[헤럴드경제(부산)=주소현 기자] 페트병, 캔, 유리병 등 재활용품을 집어 넣으면 10원 단위로 돈을 되돌려주는 무인회수기. 집 앞에 내놓으면 보잘것없는 쓰레기지만, 잘 모아 버리면 돈이 된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면서 무인회수기는 쏠쏠한 용돈벌이로 자리 잡았다.
돈만 되는 게 아니다. 비교적 잘 세척 및 관리된 재활용품들을 선별해 수거하다 보니 양질의 재생 원료를 공급하기에도 유리하다. 애써 분리배출해도 좀처럼 끌어올리기 어려웠던 재활용률을 단번에 높일 수 있는 일등 공신이 바로 무인회수기인 셈이다.
이 재활용품 무인회수기에도 ‘원조’가 있다. 전 세계에 약 10만5000개의 무인회수기를 공급한 회사, 노르웨이의 ‘톰라’(Tomra)다. 국내에도 세종시와 대형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총 17개소에 톰라의 무인회수기가 185대가 설치돼 있다. 50여 년의 업력을 바탕으로 분리배출 문화를 확산하고 순환경제 실험에 성공한 이들의 비결을 들어봤다.
부산에서 진행 중인 ‘해양 환경을 포함한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국제협약’(국제플라스틱협약)을 마련하는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 참석차 방한한 야콥 롱하우그(Jacob Rognhaug) 톰라 국제협력 총괄 부사장은 지난 24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보증금 반환 제도(Deposit Return Systems·DRS)의 성공은 법적으로 의무화된 경우”라며 “자발적인 형태로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롱하우그 부사장은 27년간 아시아, 미국, 유럽, 중동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순환경제 분야 전문가다. 톰라에서는 아시아 순환경제 수석부사장과 중국 지사장을 역임했다. 국제플라스틱협약 제1차 정부 간 협상위부터 참여했고, ‘글로벌 플라스틱 조약을 위한 비즈니스 연합’(BCGPT)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보증금 반환 제도란 일회용품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페트병이나 캔, 유리병 등 일회용 식음료 용기 판매 시 보증금을 부과하고, 이를 반납할 경우 보증금을 되돌려주는 제도다.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에서는 보증금 반환 제도가 의무화돼 있다. 이런 제도적 기반 덕에 유럽 에는 자연히 이를 손쉽게 반납할 수 있는 무인회수기도 대형 슈퍼마켓 체인 등에 보급돼 있다.
오는 2029년까지 유럽연합(EU) 전역에서 보증금반환 제도 의무화가 시행될 예정이다. 롱하우그 부사장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일부 주, 호주 전체에 보증금 반환 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며 “싱가포르 등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도 속속 도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보증금 반환 제도에 대한 저항이 거센 편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식음료는 차치하고, 카페 등 식품접객업에서 제조 음료를 판매할 경우 사용하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보증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사실상 무산됐다. 지난 2022년 11월 세종과 제주에서 시범 운영하고, 전국으로 확산할 계획이었으나 지난해 11월 돌연 지방자치단체별 자율 운영으로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제주와 세종에서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시행해야 하는 대상 카페는 총 704곳인데, 지난달 기준 283곳에서만 일회용컵 보증금제가 이행되고 있다. 전국 확대 시행을 기대했던 2023년 10월에는 513곳에서 이행됐었다. 정책이 바뀌면서 꼭 1년 만에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하는 카페가 절반 수준으로 급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롱하우그 부사장은 “당장 비용이 추가되지만 결국 되돌려받는 돈이라는 점, 이를 통해 환경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며 “보증금 반환 제도를 도입하는 어느 지역이든 처음에는 우려하더라도 실제 시행 후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톰라의 무인회수기가 발을 뗀 노르웨이의 경우, 50년 전부터 보증금 반환 제도가 시행돼 온 터라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노르웨이의 플라스틱 중 새 플라스틱은 20%, 나머지 80%은 쓰레기를 재활용한 재생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시민들의 수용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정책, 즉 ‘강제성’이라는 게 롱하우그 부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결국 정부의 야심 찬(ambitious) 도입 의지가 중요하다”며 “얼만큼 일회용 용기를 회수하고 재활용했는지 등 정보의 투명성을 높이면 정책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일회용 식음료 용기 회수가 중요한 이유,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당수 기여하는 플라스틱이 바로 일상적으로 마시고 버리는 일회용 식음료 용기다. 룸바우그 부사장은 “해변에 버려진 쓰레기의 20~25%는 식음료 용기”라고 덧붙였다.
일회용 식음료 용기에서 비롯되는 플라스틱 문제는 비교적 해결이 쉽다는 게 룸바우그 부사장의 견해다. 페트병의 경우 단일 소재로, 잘 모이기만 하면 재활용하기도 다른 플라스틱 대비 쉬워서다.
이른바 ‘폐쇄형 재활용’(Closed Recycle Loop)이다. 폐쇄형 재활용이란 재활용 과정에서 본래 특성을 잃지 않고 동일한 제품으로 재활용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가령 페트병으로 의류나 차량 내장재 등 다른 소재를 만들면 거기서 재활용 순환은 끝이 나지만, 다시 페트병으로 만들면 무한히 페트병을 재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회수와 재활용 체계가 잘 갖춰지지 않은 탓에 폐쇄형 재활용은 아직은 일부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꿈같은 이야기다. 전 세계적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9%, ‘폐쇄형 재활용’(Closed Recycle Loop)은 2%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대부분은 페트병이 차지한다.
룸바우그 부사장은 “보증금 반환 제도를 도입하면 식음료 일회용기 수거율을 90% 이상으로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룸바우그 부사장은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플라스틱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가 전 세계 플라스틱 오염을 해결하는 동시에, 한국 내에서도 묵혀뒀던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해결할 적기라고 봤다.
그는 “제1차 정부 간 협상위를 개최했던 우루과이는 당시 개회 첫날 보증금 반환 제도 도입을 선언했다”며 “아직 아시아에서 공식적으로 보증금 반환 제도가 시행되는 국가는 없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일회용품 억제를 위해 아시아 최초의 보증금 반환 제도 의무화 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