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선화공주’의 평등 메시지…천대받던 시절의 위로”…‘요즘 대중’ 만나러 온 조도깨비 [인터뷰]
라이프| 2024-07-17 19:01
싱크넥스트24 ‘조 도깨비 영숙’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몸이야 천하기로 마음이야 천할손가 입은 옷이 더럽기로 이내 청춘 더러우리’ (‘선화공주’ 중)

운율이 실린 조영숙(90) 명인의 목소리에 세월의 길이가 쌓인다. 한창 때는 하루에 두세 번,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선화공주’ 무대에 섰다. 그가 주로 맡았던 역할은 철쇠. ‘춘향전’의 방자와 닮은 인물이다.

“아버지가 소릿광대였어요. 광대의 딸로 태어나 천대받던 시절이 길었어요. 뼈에 사무친 날들도 많았고 참혹한 꼴도 당했는데, 이 대사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됐는지 몰라요.” (조영숙)

조 명인은 여성국극 1세대다. 1951년 스물셋에 광주 여성국극동지사에 입단한 이후, 사명감으로 지금껏 여성국극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 1950~60년대 최전성기를 보낸 여성국극은 판소리와 춤, 재담과 연기를 더하는 종합예술이다. 한국전쟁으로 남성의 숫자가 줄고, 여성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던 시절 생겨난 장르다. 오로지 여성 예인만이 출연했던 무대다.

여성국극의 역사를 써온 조 명인의 시간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됐다. 세종문화회관의 여름 축제 격인 ‘싱크넥스트24’의 ‘조 도깨비 영숙’을 통해서다. ‘도깨비’는 북한 원산 사범학교 시절 노래, 무용, 운동, 공부 등 못하는게 없었던 조 명인의 별칭이다.

최근 서울 성북구 작업실에서 만난 조 명인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어금니 깨지도록 이를 악물고 하고 있다“고 했다.

‘조 도깨비 영숙’엔 공연계 드림팀이 뭉쳤다. 무용, 영화, 대중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 중인 밴드 이날치의 장영규, 정가 가수이자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 멤버인 박민희가 공동 음악감독과 연출을 맡았다. 이번 공연은 장영규가 오는 10월 방송될 여성국극단 소재의 웹툰 원작 드라마 ‘정년이’(tvN)의 음악감독인 장영규 박민희가 조 명인에게 자문을 구하며 성사됐다. ‘정년이’ 역시 여성국극의 두 명인 임춘앵(1924~1975) 조영숙의 이야기를 참고해 쓴 작품이다.

싱크넥스트24 ‘조 도깨비 영숙’의 박민희, 조영숙, 장영규 [세종문화회관 제공]

‘조 도깨비 영숙’은 조 명인을 조명하는 무대인 동시에, 오늘의 공연 문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2030 세대에게 ‘잊혀진 명인’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통과 동시대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해온 장영규는 “전통의 언저리에서 작업을 해오며 공연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는 ‘명인’과 그들의 음악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지금의 대중음악과는 멀어졌으나 명인들은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이던 시절 생동하는 감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어르신들과 작업을 해볼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년간 이어온 고민의 첫 무대는 조영숙 명인이다.

“조영숙 선생님은 달라진 시대로 인한 괴리를 제대로 겪은 분이에요. 지금의 아이돌과 견줄 정도로 대중과 호흡했던 분이기에, 이전의 감각을 살려 다시 한 번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장영규)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었지만, 명인들에게 주어지는 무대는 극히 일부다. 장영규는 “지금의 젊음을 소비하는 관객과 이 어른들이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며 “선생님들이 서는 무대는 한정돼 있고, 그곳엔 우리가 대중이라 생각하는 관객들이 잘 가지 않는다. 이 둘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역사 안에서 숨 쉬는 아흔 살의 국극 스타와 젊은 관객와의 만남을 위해 장 감독의 고심이 깊었다. 그는 “‘요즘 대중’과의 만남을 위해선 요즘 공연처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조 도깨비 영숙’이 영상과 실연이 어우러진 형태로 태어난 이유다. 장 감독은 “처음부터 영상 작업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선생님과 촬영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화면을 모니터 해보니, 얼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가 보였다”며 “관객들도 선생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공연 방식에 조 명인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베테랑들이 하라고 하니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며 웃었다.

싱크넥스트24 ‘조 도깨비 영숙’ [세종문화회관 제공]

작품은 조 명인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선화공주’를 선택했다. 이번 무대를 통해 조 명인은 1인 5역을 연기한다. 과거 주로 맡았던 철쇠를 비롯해 서동, 석품, 왕, 선화공주 등이다. 조 명인은 “아흔이 돼서 선화공주 역에 데뷔하게 됐다”며 “어떤 양반들은 주책이라 할 텐데 굉장히 부담스럽다”며 웃었다. 박민희 감독은 “선생님은 작품의 모든 대사를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외고 계신다”며 감탄했다.

이번 공연엔 조 명인의 뒤를 잇는 여성국극 애제자 4명도 함께 한다. 장 감독은 “제자들과의 관계가 조 선생님의 예술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다. 선생님 역시 임춘앵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늘 강조하신다”며 “제자들로 이어져 내린 많은 유산이 공연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열여덟 살에 시작한 여성국극은 조 명인에게 삶이자 역사다. 그는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면서 “스물일곱이 되면 그만 둬야겠다 싶었는데, 그 무렵 전성기가 왔다. 선천적으로 삼마이(일본 전통 연극 가부키에서 유래된 말로, 웃음을 담당하는 조연)가 체질에 맞았다”며 오래전 기억들을 더듬는다. “역할 다운 역할을 처음 맡았던 ‘백화여장부’ 땐 구름에 둥둥 뜬 것처럼 벅찬 감정”을 느꼈고, “숱하게 무대에 올랐던 ‘선화공주’에 담긴 만인 평등의 메시지”는 예인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조 명인의 얼굴엔 몇 번이나 아쉬움이 가득 찼다.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의 오늘을 보는 것이 안타까워서다.

“창극이 음악이 중요한 국악 오페라라면, 여성국극은 연극적 요소가 강한 국악 뮤지컬이에요. 잘 이어지면 뮤지컬 못지 않은 좋은 예술이 될 거예요. 여성국극이 사라지는 건 창극의 한 축이 없어지는 것과 같아요. 이 좋은 예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조영숙)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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