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위기, 기업형슈퍼마켓 확장
GS더프레시 올해 月 평균 9개씩 증가
‘편의점 확장판’…사장님들도 변화 중
[헤럴드경제=김희량 기자] “동네 슈퍼를 10번 정도 여닫으면서 한계가 왔어요. 갖춰야 하는 물건 종류나 신제품 등 트렌드가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찼습니다.”
지난 여름, 서울 도봉구 창동에서 기존 슈퍼를 기업형슈퍼마켓(SSM)으로 전환한 최상호 점주는 20년 경력의 슈퍼 사장이다. 그가 변화를 결심한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동안 로스 관리(실물과 전산상 재고 차이)와 정기 전단행사, 인기 신상품을 상시 들여오는 걸 혼자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그는 “300평대 규모의 매장을 85평으로 줄이고, 대신 품목 수를 90~100가지로 유지한 게 가장 큰 변화”라며 “직원 한 명을 따로 둬도 하기 힘든 ‘정보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소비 패턴과 인구 구조의 변화 속에서 대형마트가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대형마트보다 작고, 편의점보다 큰 ‘근거리 장보기’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SSM은 쿠팡 등 이커머스와 대형마트, 편의점 등 양극단으로 나뉜 유통업계의 지형 변화 가운데 ‘애매한 중간자’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은 수치상으로도 희비가 엇갈렸다. 산업부의 유통업계 동향 자료에 따르면 10월 SSM의 점포당 매출 및 점포 증감률은 2.4%와 4.6%로 각각 -1.6%, -4.6%를 기록한 대형마트와 정반대의 성적표를 받았다. 2017년 국내 대형마트 점포 수는 423개에서 지난해 397개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SSM은 약 1350개에서 올해 3분기 기준 약 1400개로 소폭 늘었다.
SSM 업계의 선두 주자는 올해 7월 전국 점포 500개를 돌파한 GS더프레시다. 2019년 319점(가맹 142점, 직영 177점)이었던 매장 수는 2024년 3분기 기준 511개(가맹 398점, 직영 113점)로 급증했다. 올해만 봤을 때 매주 2개씩 신규 매장이 생긴 셈이다.
다만 모든 SSM가 웃은 건 아니다. 2022년 업계 1위였던 이마트에브리데이는 3분기 매출 3699억원, 영업이익 63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3745억원, 76억원) 대비 모두 후퇴했다. 롯데슈퍼 역시 매출과 영업이익이 3분기 기준 각각 3469억원, 123억원으로 전년 동기(3470억원, 140억원) 대비 줄었다.
1위인 GS더프레시와 나머지 주요 SSM 3사의 가장 큰 차이는 가맹비율이다. GS더프레시는 편의점(GS25)의 운영 노하우를 입혀 2022년부터 사업 방향을 틀었다. GS더프레시의 가맹비율은 78%로 롯데슈퍼(43%), 홈플러스 익스프레스(23%), 이마트 에브리데이(9%)와 차이가 크다. ‘작은 대형마트’가 아니라 ‘편의점의 확장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GS리테일은 2021년 5월부터 편의점과 슈퍼 물량을 동시에 매입해 구매단가를 낮추고 있다. SSM업계의 변화에 따라 경쟁사인 이마트에브리데이 또한 7월 이마트와 통합법인을 출범하며 ‘바잉 파워’를 높이는 방향을 택했다.
GS더프레시의 매출은 2021년 1조2150억원에서 2022년 1조3220억원, 2023년 1조4480억원으로 꾸준히 성장했다. 소비 침체로 유통업계가 위기지만, 올해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35% 성장한 380억원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다만 이 매출 성장을 기존 개별 점포의 ‘선방’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과거 동네슈퍼가 ‘전환’되며 개인 운영 슈퍼들의 매출이 흡수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GS더프레시는 GS리테일 전용 앱인 ‘우리동네GS’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나의 앱에서 SSM과 편의점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면서 마트 사전예약, 픽업은 물론 퀵커머스 형태의 배달을 동시에 제공한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올해 5월 우리동네GS MAU(월간 활성이용자 수)는 역대 최고인 357만명을 달성했다. 마트·백화점 등 오프라인 유통사 앱 중 1위다. 이는 GS더프레시 점포 수 급증과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배달의민족, 요기요, 네이버 장보기 입점 등 모든 온라인 채널을 퀵커머스와 연계해 1시간 장보기 배송으로 연결했다. GS더프레시는 매주 제철 과일·채소·수산물 등 사전 예약 행사를 진행하는데 현장 예약 또는 우리동네GS를 통해서만 이를 받고 있다.
GS리테일 관계자는 “수산, 정육 등 대면 판매 작업 코너를 최소화하고 반조리 식품을 내놓는 체인오퍼레이션을 2019년부터 강화했다”면서 “우리동네GS 앱을 중심으로 한 O4O(Online for Offline, 오프라인을 위한 온라인) 연계를 고도화하고 구도심, 신도시 등 입지별 맞춤 출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기존 슈퍼 운영 자영업자들의 이런 선택을 자연스러운 생존전략으로 분석한다. 박진용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독립적인 소매 점포들이 현 상황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상품의 진열·공급 등에 변화를 줘야 하는데 기업형 슈퍼마켓의 조직화된 매입·큐레이션 역량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을 하는 ‘동네 슈퍼’ 사장 입장에서는 SSM에 흡수되거나 참여하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동시에 SSM 사업은 기업 입장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업계에 따르면 전국의 슈퍼마켓과 잡화점은 6만여 곳으로 연 매출 규모가 65조원으로 추정된다. 국내 대형마트 3사(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의 지난해 연매출(약27조8078억원)의 2배가 넘는다. ‘전환’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롯데슈퍼 등은 최근 그랑그로서리 도곡점을 400여 평 규모 식료품 전문 매장을 여는 등 진화한 점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SSM 점포들이 확산할수록 개성과 특색 있는 슈퍼보다 표준화된 슈퍼마켓이 늘어난다는 점은 한계다. 자영업자들이 프랜차이즈 슈퍼마켓 사업으로 종속되는 셈이라서다.
일본에서는 각각의 독립적인 소매점들이 협력하는 조합 형태의 볼룬터리 체인(voluntary chain)이 지역적 특색을 살린 슈퍼를 선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형태가 자리 잡기 어렵다.
기존 규제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동네 슈퍼들이 SSM으로 속속 전환하고 있지만, 영업 시간과 휴업일 등 각종 규제를 받고 있어서다. 한 SSM 가맹점주는 “동네에서 슈퍼는 우리가 유일하지만, 동네 어르신을 대상으로 두부나 콩나물을 영업시간 외에 팔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장이 하는 가게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물건을 살 수 없는 시간과 요일(의무휴업일)이 생기게 된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