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시대, 변하지 않은 ‘칸의 권위’
변화의 흐름 속에서 ‘극장의 가치’ 고집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칸 영향력 확대
‘작가주의’ 강화…오래 살아남는 영화 추구
취향의 발견’은 나도 몰랐던 나의 문화적 취향을 알려주는 코너입니다.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면 의외로 도움이 되는 문화 상식을 친절하게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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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지금 프랑스 남부 칸은 전 세계에서 모인 ‘별’들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막을 올린 ‘제79회 칸국제영화제’ 때문인데요.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빛내는 가운데, 그들이 야심 차게 준비한 영화들이 작은 도시 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약 열흘간 이어지는 축제 동안 칸은 전 세계 영화인과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거대한 ‘쇼케이스’가 됩니다. 어떤 보물 같은 영화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지, 기대를 감출 수 없는 순간입니다.
특히 올해 칸은 한국 영화계에도 유난히 반갑고 뜻깊은 현장이 될 전망입니다. 지난해 ‘초청작 0편’이라는 굴욕을 뒤로하고, 올해는 경쟁 부문 진출을 포함해 총 3편의 한국 영화가 칸의 초청장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나홍진 감독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호프’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4년 만에 황금종려상 레이스에 도전합니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을 통해 칸에서 최초 공개되고요. 장편 영화마다 꾸준히 칸의 부름을 받아온 정주리 감독 역시 신작 ‘도라’로 다시 한번 칸을 찾습니다.
무엇보다 올해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은 바로 ‘깐느 박’ 박찬욱 감독입니다. 한국인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를 이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박 감독은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심사위원인 데미 무어, 클로이 자오 감독 등과 함께 등장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전 세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죠.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리고 왜 ‘칸’ 때문에 울고 웃게 된 걸까요. 모두가 앞다퉈 영화와 극장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대(大) 스트리밍 시대’ 속에서, 왜 전 세계 영화인들은 여전히 엄격한 드레스 코드와 새빨간 카펫, 긴 기립박수 같은 어쩌면 구시대적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갈망하는 걸까요. 오늘의 ‘취향의 발견’에서는 전 세계 영화인의 성지, 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넷플릭스 출입금지’…변화의 시대 속 ‘본질’을 택한 칸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모두 유럽에서 열리지만, 영화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추구하는 방향은 제각각입니다. 권위와 작가주의의 칸, 스타성과 오스카 레이스의 베니스, 사회성과 시대정신의 베를린까지. 같은 영화제라도 분위기와 색깔은 꽤 다르죠. 어떤 영화제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이미지와 이후 행보까지 달라질 정도입니다.
이들 가운데서도 칸은 유독 고집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바로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작품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프랑스 극장 업계가 고수하고 있는 홀드백(holdback·극장 개봉 후 스트리밍 공개까지의 기간) 규정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베니스와 베를린이 상대적으로 ‘넷플릭스 친화 정책’을 펼쳐온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물론 칸이 OTT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칸은 2017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옥자’와 노아 바움백 감독의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를 경쟁 부문에 올리며 처음으로 넷플릭스 영화들을 품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프랑스 극장 업계는 극장 개봉 계획이 없는 영화가 경쟁 부문에 진출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했고, 논란은 거세게 번졌죠.
결국 이듬해 칸은 공식 선정 규정에 다음과 같은 원칙을 명문화합니다.
“경쟁 부문에 초청된 모든 장편영화는 프랑스 규정을 준수해 프랑스 극장에서 상업적으로 개봉돼야 한다.”
이를 계기로 칸은 다른 영화제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스트리밍의 시대’ 속에서도 ‘극장’이라는 전통을 지키는 영화제로서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갖게 된 것이죠. 이같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칸의 태도는 결국 하나의 철학으로 수렴됩니다. 영화의 본질은 ‘극장에서 함께 보는 경험’에 있다는 것입니다.
칸의 권위가 넷플릭스를 거부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칸 vs 스트리밍’ 논쟁을 통해 우리는 스트리밍 플랫폼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칸의 철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시청자에게 동시에 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의 강력한 힘 대신, 칸이 선택한 것은 ‘영화와 극장’의 시너지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영화였습니다.
상영 전의 설렘, 극장으로 향해 타인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 전 세계 최초 공개가 주는 짜릿함, 긴 기립박수와 경쟁, 그리고 시상까지. 영화가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면서 오히려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업계의 냉소는 칸 앞에서 무색해집니다.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칸을 향한 시선을 바꾸다
칸이 선택한 길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2000년대 들어 칸과 베니스 영화제는 ‘더 흥미로운 작품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를 놓고 일종의 냉전을 이어왔는데요. OTT에 문을 활짝 연 베니스는 넷플릭스 영화 ‘로마’(2018)와 ‘파워 오브 도그’(2021)에 각각 황금사자상과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여했고, 이외에도 ‘결혼 이야기’, ‘신의 손’, ‘화이트 노이즈’, ‘블론드’ 등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덕분에 베니스는 오스카 레이스의 ‘신호탄’ 역할까지 맡게 됐죠. 하지만 넷플릭스와 거리를 둔 칸은 선명한 세계관과 독창적인 영화 언어로 대표되는 ‘작가주의’를 꾸준히 고집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모든 흐름을 뒤흔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거머쥔 것입니다. 비영어권 영화 최초의 작품상 수상이자, 1955년 영화 ‘마티’ 이후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첫 사례였는데요.
칸 입장에서는 의미가 남다른 순간이었습니다. 칸의 영향력 안에 오스카라는 거대한 시상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다, 스트리밍과 대중성의 시대 속에서도 칸만의 정체성이 여전히 통한다는 점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올해 영화제를 앞두고 이렇게 짚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아카데미는 거의 미국 영화만의 무대였다. 변화는 ‘기생충’부터 시작됐다.”
이후에도 칸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들은 꾸준히 오스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2023년 칸 황금종려상과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를 받은 ‘추락의 해부’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듬해 아카데미에서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음향상을 각각 수상했죠. 지난해 오스카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5관왕에 오른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 역시 칸이 발굴해 황금종려상을 안긴 작품입니다.
올해 오스카에서도 지난해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을 비롯해 ‘센티멘털 밸류’, ‘시라트’, ‘더 시크릿 에이전트’ 등 이른바 ‘칸 출신’ 작품들이 대거 후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의 ‘아르코’와 ‘리틀 아멜리’ 역시 칸에서 여정을 시작한 작품들이고요.
칸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영화제의 위상은 여전히 높고, 우리의 영화들은 오스카로 간다”고 자신하기도 했는데요.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작품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먼저 발견해 내고, 작품과 감독을 순식간에 세계적인 궤도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바로 칸이 가진 저력이자, 여전한 권위의 근원입니다.
2007년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올해 영화 ‘피오르’로 다시 한번 최고상에 도전하는 크리스티안 문지우의 말은 영화계에서 ‘칸’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칸 선정 자체가 이미 최고의 보상입니다.”
“100년 뒤에도 남을 영화”…칸이 지키려는 가치
올해 칸 경쟁 부문 라인업에는 칸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독립·예술영화계 거장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아쉬가르 파라디, 하마구치 류스케, 고레에다 히로카즈, 크리스티안 문지우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두고 많은 외신과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칸이 다시 한번 작가주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반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존재감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올해 칸에서 가장 주목받는 할리우드 스타는 첫 연출작을 들고 영화제를 찾은 존 트라볼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인데요. 그만큼 올해 칸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정체성과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반짝 등장했다 어느 순간 빠르게 사라지는 변화의 시대 속에서도 칸은 오늘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영화, 다시 말해 ‘극장 생명력’을 가진 작품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박찬욱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은 영화제 개막에 앞서 “상은 50년, 100년 뒤에도 남을 작품에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기도 했죠.
그의 말처럼 관객과 함께 만나는 영화, 감독 중심의 영화, 그리고 작가주의라는 영화의 정체성은 변화의 시대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빨리, 많이 소비되는 것과 오래 살아남는 것 중 과연 더 강한 것은 무엇일까요. 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이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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