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고령농지 일률 처분 않고 정상 이용 기회
관행적 임대차도 요건 갖추면 처분 유예
투기 목적은 엄정 조치…농지법·특별조치법 손질
[헤럴드경제=김선국 기자] 정부가 농지 전수조사에서 확인된 위반 농지를 일률적으로 처분하는 대신, 투기 목적이 아닌 관행적·경미한 위반은 농지은행 등을 활용해 정상화하기로 했다. 고령이나 상속·이농으로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운 농지는 자진 정비 기회를 주고, 정비가 어려우면 농지은행에 임대·관리권을 위탁해 처분 의무를 유예한다. 농업인 간 관행적으로 이뤄진 임대차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인다.
반면 허위 영농계획서로 농지를 취득해 불법 임대하거나 개발이익을 노린 투기성 농지 취득, 농업진흥지역 내 야적장·야영장 등 중대한 불법 전용은 기존처럼 처분명령이나 원상회복명령 등 엄정한 조치를 받는다.
농지 관리에서도 자경 여부만을 기계적으로 따지기보다 농지가 실제 농업에 이용되고 있는지, 위반 경위가 무엇인지 등을 함께 살펴 제재와 정상화 여부를 달리하는 방향이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더불어민주당은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농지 전수조사 추진방향 당정협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전수조사 후속조치와 농지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고령·상속농지는 ‘팔아라’ 대신 ‘농지은행’ 활용=이번 후속조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관행적 임대차나 휴경 등 경미한 위반을 곧바로 처분 절차로 넘기지 않는 것이다.
현행 농지법은 농업인이 직접 경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농지를 직접 경작하지 않거나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임대하면 일정한 절차를 거쳐 농지 처분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전수조사에서 위반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농촌 현실을 감안해 우선 소유자에게 자진 정비 기회를 주기로 했다.
자진 정비가 어려운 경우에는 농지은행에 농지의 임대·관리권을 위탁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농지은행이 농지를 관리해 실제 농사를 지을 농업인에게 임대하면 소유자는 농지를 계속 보유하면서도 농지의 농업적 이용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정부는 소유한 지 3년이 지난 농지에 대해 특별정비 기간 중 농지은행에 임대를 위탁하면 추가 보완조사 없이 조사를 종결하는 방안도 내놨다. 농지 임대차 특별정비 기간은 오는 11월 15일까지 운영한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농지를 상속받았지만 자녀가 직접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고령으로 농사를 중단한 경우가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농업인이 마을의 여러 필지를 모아 경작하거나 농업인끼리 농지를 바꿔 경작하는 이른바 ‘교환 경작’, 소유자 대신 이웃 농업인이 농사를 짓는 관행적 임대차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정상화할 수 있도록 한다.
상속으로 농지를 소유한 경우 현행 제도상 상속농지는 일정 범위에서 소유가 가능하지만 1㏊를 초과하는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농식품부는 상속으로 1.5㏊를 보유하고 이를 모두 임대한 사례라면 1㏊를 초과하는 농지를 농지은행에 위탁하도록 안내할 방침이다.
농지은행을 통해 확보한 농지는 청년농·전업농 등 실제 경작자에게 공급한다. 고령농이나 상속인이 농지를 당장 처분하지 않으면서도 농업적 이용을 유지하고, 실제 농사를 지을 농업인은 농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농지의 가치에 따른 관리 방식도 달라진다. 생산성이 높은 우량농지는 투자를 확대하고 규모화·집적화를 추진한다. 농지은행 등을 통해 확보한 농지는 청년농과 전업농 등 실제 경작자에게 공급한다. 반대로 농지로서 가치가 떨어진 토지는 실제 이용 상태에 맞게 지목을 현실화하거나 대체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우량농지는 투자를 확대하고 규모화를 통해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야 한다”며 “가치가 떨어지는 농지는 지목을 현실화하거나 대체 활용 방안을 찾아 오히려 농촌에 사람이 돌아오고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불법 전용도 38년 만에 ‘사후 양성화’...‘농사 안 짓는 사람’과 ‘농지 투기꾼’은 구분=불법으로 다른 용도로 사용해온 농지에도 정상화의 길을 열기로 했다. 농지전용 허가나 신고 없이 시설을 설치한 농지 가운데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농지보전부담금을 납부한 뒤 사후 전용을 추인해 합법화할 수 있도록 특별조치법 제정을 추진한다. 불법 전용 농지를 사후적으로 양성화하는 것은 1988년 이후 38년 만이다.
대상은 전수조사가 시작된 5월 18일 이전에 설치가 완료된 시설 가운데 농지법이나 다른 법령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로 제한한다.
다만 모든 불법 전용을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진흥지역에 야적장이나 야영장 등을 설치하는 등 중대한 불법 전용이나 투기 목적의 전용은 원상회복 대상이다. 허위로 농업시설을 설치한 뒤 음식점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한 사례나 다른 법률상 금지된 시설 등도 양성화 대상에서 제외한다.
정부가 이번 후속조치에서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투기 목적의 농지 취득이다.
농사를 지을 의사 없이 허위 영농계획서를 제출해 농지를 취득한 뒤 다른 사람에게 경작을 맡기거나 개발이익을 노린 경우, 농업법인이 농지를 취득한 뒤 부동산 개발·매매 등에 활용한 경우 등은 기존처럼 처분명령이나 원상회복명령 등 엄정한 조치를 받는다.
농식품부가 제시한 사례에서는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 122명이 허위 영농계획서를 제출해 농지를 취득한 뒤 기존 소유자에게 경작을 맡겨 422억원 규모의 투기이익을 얻은 사례가 있었다. 허위 농업법인을 만들어 개발 예정지 인근 농지를 매입한 뒤 지분을 쪼개 되팔아 107억원의 이익을 얻은 사례도 제시됐다.
송 장관은 “투기는 바로잡겠다”며 “경미하고 관행적인 현장의 위반은 계도하거나 제도를 개선하고 대안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전수조사 해보니 드러난 ‘30년 농지법’의 간극=정부가 이번 전수조사를 농지제도 개편으로 연결하는 배경에는 1996년 현행 농지법 시행 이후 달라진 농촌 현실이 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상속·이농 등으로 농지 소유자와 실제 경작자가 달라지는 사례가 늘었지만 농지제도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이번 전수조사는 이런 농지 소유·이용 실태를 전국 단위로 파악하기 위해 추진됐다. 정부는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 136만㏊를 대상으로 5~7월 기본조사를 실시했고, 8월부터 현장 확인 중심의 심층조사에 들어갔다. 기본조사에서는 전체 조사 대상의 27.0%인 284만 필지가 농지법 위반 의심 대상으로 분류됐다. 다만 이는 행정정보 등을 토대로 선별한 ‘의심’ 단계로 실제 위반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현장 사례를 토대로 현실과 맞지 않는 농지제도를 손질할 계획이다. 농지법상 임대차·휴경 허용 사유와 임차농 보호 방안을 정비하고, 처분 유예와 불법 전용 사후 추인 등을 위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추진한다. 이후 필요한 사항은 농지법 개정을 통해 제도화한다는 방침이다.
권칠승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농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조사 결과를 처리하고 정상화 방안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필요한 법률 제·개정과 예산 확보를 전폭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adastr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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