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SO지휘자워크숍의 뜨거운 현장

최재혁·권수정·오성빈·정선우 등

“테크닉 지적보단 작품 큰 그림 제시”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정선우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정선우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휘봉을 쥔 손끝에 50여 명의 숨결이 팽팽하게 걸린다. 정적을 깨고 허공을 가르는 예비박 하나에 웅장한 음향의 파도가 연습실을 가득 채운다. 악보를 응시하는 청년 지휘자들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포디움 옆 한쪽에 선 ‘거장의 시선’은 오케스트라의 질감과 지휘자의 숨소리를 집요하게 좇는다.

“장례 행진에서 관을 메고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상상해 보세요.”

독일 오스나브뤼크 시립극장 제2카펠마이스터로 활동 중인 오성빈 지휘자는 베토벤 ‘영웅’ 교향곡 2악장을 연주할 때 아바도 감독이 했던 이 말이 잊히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대신, 음악에 걸맞은 이미지를 상상하게 해 음악의 성격을 잡는 방식이다. 거장의 죽비 같은 한마디는 포디움의 공기를 시시각각 바꾼다.

작곡에서 출발해 지휘봉을 잡은 스물네 살 막내 정선우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났다. ‘석사 과정 재학’이라는 지원 자격을 갖추자마자 도전장을 내민 역대 최연소 참가자. 데뷔 경험이 없는 데도, 프로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유연한 손목으로 허공을 가를 때마다 날것의 강렬한 음악과 섬세한 호흡이 동시에 빚어졌다. 보면대 너머 단원 한 사람 한 사람과 끈끈하게 눈을 맞추며 원하는 소리를 엮어내는 권수정, 선율의 미세한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한 표정으로 화답하는 오성빈, 틀에 갇히지 않은 창의적인 제스처와 노련함으로 악단을 쥐락펴락하는 최재혁까지. 각기 다른 네 가지 색채가 포디움 위에 펼쳐졌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 내 국립예술단체 연습실에서 열린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의 현장에선 9.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차세대 지휘자 4인과 20대 청년 연주자로 구성된 KNSO아카데미 오케스트라가 마주했다. 이곳은 저마다의 음악적 이상과 냉혹한 현실이 격돌하는 치열한 도량인 듯 보였다.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최재혁 지휘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최재혁 지휘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아바도 취임 후 첫 워크숍… 테크닉 넘어 ‘인문학적 큰 그림’을 열다

올해는 제8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로베르토 아바도가 국내 신진 지휘자들과 처음으로 호흡한 자리였다. 거장의 지도 방식은 기성 마스터클래스의 ‘전형적인 문법’을 비껴갔다.

참가자들은 아바도 감독에 대해 “테크닉을 지적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인문학적 맥락까지 파고드는 철저한 준비를 강조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은 베토벤 교향곡 3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밀도높게 파고드는 시간을 가졌다. 최재혁은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 당시를 떠올리며 “감독님은 온화하게 돌려 말하지만 날카롭게 꽂힌다”며 “연주를 들은 뒤 작곡가의 서신이나 당대 에세이를 읽어봤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사실 그건 ‘준비가 덜 됐다’는 지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아바도 감독은 단편적 박자 쪼개기 대신 “두 마디를 프레이징해 긴 호흡으로 엮어가라”며 본질적 음악 언어를 제시하곤 했다.

아바도 감독의 화법에 ‘청년 지휘자’들도 큰 자극을 받았다. 오성빈은 “기술적 지적 대신 ‘음악 자체를 지휘한다’는 거시적 감각을 깨워주셨다”고 돌아봤다. 참가자 중 유일하게 국내 양대 악단(서울시향, 국심)의 지휘자 워크숍에 모두 참석했던 최재혁은 “앞서 서울시향 마스터클래스에서 겪은 얍 판 츠베덴 감독님은 시선부터 손목까지 모두 짚어내는 엄청난 디테일의 지도 방식이었다면, 아바도 감독님은 개입을 아낀 채 스스로 호흡을 찾게 하는 ‘큰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워크숍 일정을 함께 한 킴 놀테미 LA필하모닉 대표는 아바도 감독을 ‘훌륭한 스승’이라고 평했다. 그는 “네 지휘자가 스스로 연주해 보도록 하고, 면밀히 지켜본 후 작은 제안을 던져 실수를 통해서든 다른 시도를 통해서든 스스로 배우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성장의 핵심”이라며 “아바도 감독은 모든 것을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지시하고 ‘틀렸으니 다시 하라’고 반복하기보다 두세 가지의 제안으로 체화하도록 돕는다”고 했다.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올해 첫 워크숍을 마친 아바도 감독은 “네 지휘자와 함께 할 수 있어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다. 서로 다른 네 명의 훌륭한 개성을 봤다”며 “이들 네 사람의 서로 다른 비전과 개성을 존중하고 싶었고, 지휘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사흘간 만난 네 지휘자를 워크숍에 참석하는 학생이 아닌 ‘동료’로서 바라봤다.

“전 네 사람을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 단지 경험이 조금 더 많은 동료일 뿐입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멋진 순간을 경험하겠지만, 비판과 저항으로 흔들리고 우울해질 때도 있어요. 내면을 단단히 다지고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소중한 기회, 하나라도 더”…‘포디움 결핍’ 뚫은 생존의 분투

소수정예로 진행되는 ‘KNSO지휘자 워크숍’에 선발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네 사람의 이력도 쟁쟁하다.

2017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최연소 1위이자 매네스 음악대학 전문연주자과정(PDPL) 종료를 앞둔 최재혁, 빈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 디플롬 과정의 권수정,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석사과정의 정선우, 독일 현역 카펠마이스터 오성빈 등 모두가 K-클래식의 유망주들이다.

화려한 이력을 안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차세대 지휘자들에겐 늘 ‘포디움의 결핍’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기성 악단에 설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구조적 병목 현상을 마주하기에 마스터클래스와 워크숍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절박한 무대이기도 하다.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권수정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권수정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최재혁은 “콩쿠르와 마스터클래스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사실 무대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며 “가만히 있으면 존재를 알릴 수 없는 현실에서 마스터클래스는 ‘가장 겸손하게 자신을 알리는 유일한 통로’”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놀테미 대표는 “서울에서 이런 워크숍이 열리는 것은 지휘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도 좋지만, 훌륭한 한국 지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결코 특별하거나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높이는 데도 유익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어쩌면 훌륭한 수백 명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들을 직접 볼 기회가 없기에 이런 자리를 특별한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지휘자를 꿈꾸지만, 지휘를 마음껏 할 수 없는 것도 젊은 지휘자들의 현실적 어려움이다. 악단 소속이 아닌 이상 이들이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자비를 털어 오케스트라의 지휘 시간을 사지 않는 이상 그렇다. 권수정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원한 첫 2회차 참가자다.

그는 “아바도 감독님이 20대 시절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처음 지휘했을 때 ‘소형차를 몰다 포르셰에 탄 기분’이라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프로급 악단 포디움은 학교 실습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며 “이미 완성된 연주자들에게 ‘어떤 음악적 아이디어를 더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한 전환점이 됐다. 그것이 학생 지휘자에겐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정선우 역시 “작곡을 하다 오케스트라 음향의 밀도에 매료돼 지휘를 시작했지만, 실제 악단 앞에 설 기회는 극히 드물다”며 “오케스트라를 온전히 지휘해 보는 하루 한 시간은 엄청난 기회”라고 말했다.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오성빈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오성빈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동일한 악보를 두고 펼쳐진 네 갈래의 해석은 서로에겐 ‘생생한 거울’이었다. 이들은 객관적인 관찰자이자 동료로서 리허설을 지켜봤다. 닮은 해석엔 고개를 끄덕이고, 낯선 지점에선 ‘소리의 이유’를 치열하게 자문하며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닫힌 경쟁을 넘어선 살아있는 ‘음악적 연대’였다.

정선우는 “같은 템포를 설정했는데도 지휘자마다 빚어내는 소리의 질감이 전혀 달라, 오케스트라가 저렇게도 반응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배움이었다”고 돌아봤다. 최재혁 역시 “오성빈 지휘자가 베토벤을 연주할 때 시도한 해석적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 다음 내 차례 때 그 아이디어를 써봐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포디움에서 시험해 보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권수정 또한 “정선우에게선 지휘자로서의 확신을, 오성빈에게선 좋은 소리의 기준과 리허설의 효율성을, 최재혁에게선 포디움 위에서의 여유와 창의성을 발견했다”고 돌아봤다.

이번 워크숍의 성공을 든든하게 받친 또 다른 주역은 KNSO아카데미 오케스트라였다. 평균 연령 20대 중반의 청년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기성 오케스트라 관습적 매너리즘 없이 지휘자 4인의 각기 다른 음악적 요구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오성빈은 “아카데미 단원들이라 해서 기대치를 낮추지 않았음에도 반응 속도가 놀라울 만큼 빨라, 말로 길게 설명하지 않고 지휘 동작만 보여줘도 즉각 소리가 변했다”고 감탄했다. 최재혁 역시 “눈빛이 초롱초롱한 최상위 컨디션의 프로들이었다. 기성 악단 앞에서의 심리적 위축 없이 머릿속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안전한 그라운드를 만들어줬다”고 극찬했다. 권수정 또한 “네 명의 지휘자가 요구하는 다른 해석에 흐트러짐 없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화답해 준 단원들 덕분에 함께 호흡을 빚어가는 끈끈함을 느꼈다”고 했다.

멘토인 아바도 감독은 감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네 명의 지휘자가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했음에도 단원들은 놀라운 유연함과 집중력으로 그들을 따랐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며 “청년 단원들과 마주하며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지켜보는 내내 나조차 직접 포디움에 올라 이들과 함께 지휘하고 싶었을 정도”라고 찬사를 보냈다.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정선우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2026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 지휘자 워크숍’ 현장에서의 정선우 지휘자와 로베르토 아바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미국·유럽과 같은 수준”…韓 지휘자, 세계로 향한다

“모르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며칠의 시간으로는 오케스트라를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죠. 이러한 불리함에도 네 사람은 정말 잘 해냈어요. 미국과 유럽의 동료들과 완전히 같은 수준이에요.”

킴 놀테미 대표는 사흘간의 여정을 지켜보며 “네 명 모두 매우 재능이 있고 잠재력이 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흘의 여정을 마친 네 사람은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할 세계의 무대로 이어진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장학금 250만 원이 수여되는 우수 지휘자로 선정된 최재혁은 “브람스 교향곡 전 악장을 오케스트라와 끝까지 완주한 경험 자체가 큰 자산이다”이라며 “아바도 감독님이 ‘발전했다’고 격려해 주신 만큼 포디움 앞에서는 마흔, 쉰이 되어도 늘 겸손한 학생으로 임하겠다”고 소감을 들려줬다. 현대음악단체 앙상블 ‘블랭크’를 이끄는 그는 내년 초 스페인 국영 방송 RTVE 심포니 오케스트라(Orquesta Sinfónica RTVE) 포디움에 오른다.

차세대 지휘자 권수정의 행보 역시 기대를 모은다. 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홀에서 하이든 교향곡 연주가 예정돼 있고, 내년 1월엔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과 시벨리우스 작품을 선보이며 유럽 무대 데뷔전을 치른다. 권수정은 “악보 너머의 아이디어를 찾아내 오케스트라의 생생한 소리로 구현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마리스 얀손스의 야생적 질감과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유려한 부드러움을 음악적 롤모델로 꼽은 막내 정선우는 “모두의 공감은 아니더라도 단 한 사람에게 거대한 울림을 줄 수 있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들려줬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