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남과 북 사이에 그어진 선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됐다.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이념의 대립과 힘의 논리가 집어삼킨 국제 질서 앞에 산산히 무너졌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들과 이어진 끊어지지 않는 수 많은 ‘연(緣)’이 있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역사와 문화적 공감대 같은 것들, 그리고 ‘음식’이다.
음식은 문화 중 가장 오래된 기억장치일지 모른다.
엄마가 빚던 만두, 할머니가 담그던 식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따라 음식도 따라왔다. 재료를 구할 수 없으면 다른 재료를 썼고, 조리법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 손에 익은 방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음식은 떠나온 그곳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권농동 내일의식탁에서 열린 ‘평화를 이야기하는 20인의 식탁’에서는 기억을 이어주는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랐다. 사단법인 통일농수산사업단이 주최하고 통일부가 후원한 이번 행사의 주제는 ‘맛의 탯줄’이었다.
‘맛의 탯줄’은 가족에게서 배운 음식과 입맛이 이주와 분단, 세대교체 속에서도 이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탯줄이 한 생명을 어머니와 연결하듯, 음식은 사람과 고향,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행사에는 북한 출신 요리 연구가 장유빈 셰프, 회령식 가양주를 빚는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 이북음식 다이닝을 운영하는 최지형 리북방 셰프, 실향민 3세 정연주 푸드 에디터가 참여해 이북 음식을 선보였다. 이들이 가져온 이북 음식은 화려한 궁중음식도, 완벽하게 보존된 전통음식도 아니었다. 대부분 집에서 먹던, 일상의 북한 음식이었다.
그렇기에 음식에는 개인의 역사가 선명하게 남았다. 장유빈 통일음식문화연구원장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어머니에게 배운 음식을 만들었다. 언감자가루로 빚은 언감자밴새와 북한식 만두, 가자미식해, 영채김치, 인조고기 반찬, 마른가지볶음, 풋토마토무침, 쉼떡 등이 식탁에 올랐다. 그 가운데 만두와 쉼떡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맛을 이어가는 음식이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는 외가에서 이어받은 가양주를 가져왔다. 태좌주와 농태기, 삼팔주가 술상에 놓였고, 된장국물에 호박잎과 국수를 넣은 된장국수도 소개됐다. 술을 먼저 마시고 국수로 마무리하는 ‘선주후면’의 문화까지 음식과 함께 전해졌다.
실향민 음식의 특징은 ‘그대로 보존됐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다. 실향민 3세대인 정연주 푸드 에디터가 소개한 김치밥과 밥식해, 이른바 ‘야매식해’가 이를 보여준다.
피난을 떠난 외할머니는 고향의 조리법을 온전히 가져올 수 없었다. 기억 속에 남은 맛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딸에게, 다시 손녀에게 전해졌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음식과 똑같은 맛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음식의 기억은 살아남았다.
전통음식에서 흔히 말하는 ‘원형’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변형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전승이다. 사람이 이동하면 음식도 이동하고, 음식이 이동하면 그 음식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
그래서 음식문화는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억에 가깝다. 남과 북의 음식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이번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남북의 식문화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줬다.
옥수수와 감자, 북어처럼 남과 북에서 모두 익숙하게 사용해온 식재료가 식탁에 놓였다. 겉절이와 빈대떡, 만두와 식해처럼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음식도 있었다.
물론 조리법과 먹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식재료도 지역과 가정에 따라 다른 음식이 됐다. 하지만 그 차이는 완전한 단절보다는 오랜 시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결과에 가까웠다.
음식은 이처럼 문화의 경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경계가 얼마나 느슨한지도 보여준다. 행사장 원탁에 마련된 붉은색과 푸른색 소금은 이를 상징했다. 남과 북을 상징하듯 서로 다른 색으로 놓인 소금은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금씩 섞였다. 시간이 지나자 두 색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김원일 통일농수산사업단 상임이사는 “통일이라는 말이 너무 멀어졌다면 평화부터 이야기하면 됩니다. 거창한 무대를 만들 수 없다면 스무 명이 둘러앉는 식탁부터 차리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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