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올해 노벨평화상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법률가 나비 필라이(85)에게 돌아가자 이스라엘 정부가 거세게 반발했다. 필라이가 이끈 유엔 조사위원회가 지난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수상을 환영했다.
9일(현지시간) AP통신과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이스라엘 외무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 올린 성명에서 “필라이에게 노벨평화상을 주는 것은 정의를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무부는 이번 수상을 두고 21세기 최대의 거짓말에 상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벨평화상이 이스라엘을 향한 증오와 편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비판도 내놨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측이 나치 독일의 선전 책임자 요제프 괴벨스가 지옥에서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전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X에 “노벨위원회는 도덕적 나침반을 잃었다”고 적었다. 필라이를 두고는 유대인 국가를 겨냥한 ‘피의 중상모략’으로 경력을 쌓은 인물이라고 맹비난했다. 피의 중상모략은 유대인이 종교 의식을 위해 아이를 해친다는 거짓 소문으로,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을 박해하는 구실이 됐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는 까닭은 필라이의 최근 활동에 있다. 필라이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유엔 인권이사회가 꾸린 독립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조사위는 지난해 9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보고서를 냈다.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은 한 민족이나 집단을 없애려는 뜻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당시에도 사실을 왜곡한 결론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조사위는 유엔 전체를 대표해 발언하는 기구가 아니며, 보고서에 법적 구속력도 없다.
노벨위원회는 논란에 선을 그었다. AFP통신에 따르면 위원회는 이번 수상이 가자지구 집단학살 여부에 대한 입장 표명은 아니라고 밝혔다. 예르겐 바트네 프뤼드네스 위원장은 넬슨 만델라를 변호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긴 경력 전체에 주는 상이라고 설명했다. 위원회가 내세운 선정 이유는 ‘평화와 국제법 증진을 위한 노력’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필라이가 “부패한 검사”를 정당화했다고도 비난했다. 카림 칸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을 겨냥한 말이다. ICC는 전쟁범죄 같은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재판하는 국제 법원이다.
칸 전 검사장은 2024년 5월 가자지구 전쟁과 관련해 네타냐후 총리의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그는 여성 직원을 상대로 성 비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고, 올해 7월 회원국 투표로 해임됐다. 125개 회원국 가운데 82개국이 해임에 찬성했다. 칸 전 검사장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팔레스타인 측 반응은 정반대였다. PA 외무부는 이번 수상이 “진실의 목소리,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높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필라이가 조사위를 이끌며 이스라엘의 범죄 혐의를 기록한 점도 높이 샀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고위 인사 바셈 나임은 가자 주민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이라고 반겼다.
국제사회에서도 축하가 이어졌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필라이를 국제법과 인권의 옹호자라고 치켜세웠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축하의 뜻을 전했다.
미국의 대응은 달랐다. 수상 발표 몇 시간 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ICC 제재를 발표했다. 그는 X에 올린 영상에서 “ICC가 위협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가 ICC를 끝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제재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ICC라는 기관 자체를 겨냥했다. 미국 안에 있는 ICC 자산을 묶고 ICC와의 거래를 막는 내용이다.
필라이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ICC 재판관을 지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축하 인사 대신 노벨위원회를 비난하는 글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필라이는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장과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지금은 나라 사이의 분쟁을 다루는 유엔 법원인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미얀마의 집단학살 혐의 사건을 맡은 임시 재판관으로 일한다. 시상식은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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