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까지, 국내 5개 도시 첫 내한 투어
숨죽인 객석 깨우는 ‘고음악계 무법자’
성소수자 박해 노래한 ‘퀴어 수난곡’
“악장 사이에도 박수, 무대 위엔 웃음”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바흐의 ‘요한 수난곡’(예수의 고난을 그린 음악). 선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약 300년 전 음악 위에 새로 쓴 것은 이야기였다. 성서의 수난 서사가 있던 자리에 성소수자가 겪어낸 박해가 들어섰다. 2022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고음악축제. 1730~31년 바로 그 도시에서 벌어진 동성애자 박해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고음악 단체 아트하우스17의 ‘퀴어 수난곡(Queer Passion)’이다. 시대악기로 수백 년 전 소리를 되살리는 고음악계에서 이들은 ‘고음악계의 무법자들’로 불린다.
“우리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요. 기존 틀에 딱 들어맞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는 뜻이니까요. 우린 다른 게 좋아요.” (아트하우스17)
아트하우스17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10일 고양아람누리를 시작으로 11일 아트센터인천, 14일 세종예술의전당, 15일 대구콘서트하우스, 17일 통영국제음악당까지 다섯 도시에서 관객과 만난다. 하프시코드·리코더 연주자 미하엘 헬, 작가이자 드라마투르그 토마스 회프트,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게오르크 크로나이스 등 세 공동예술감독이 모두 내한했다. 소프라노 소피 데인먼과 그래미상 수상자인 바리톤 디트리히 헨셸도 함께 무대에 선다.
무법자의 법은 ‘다름’
고음악은 통상 18세기 중반까지의 음악을, 당대의 연주 관행과 거트현(양의 창자로 만든 현) 같은 시대악기로 되살리는 흐름을 말한다. 옛 소리를 충실히 되살리는 것이 이 세계의 오랜 미덕이었다면, 아트하우스17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300년 전의 공연을 그때 그대로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고, 어쩌면 그게 가장 큰 가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시대악기로 고음악을 연주하는 건 작곡가가 익숙했던 소리의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서예요. 하지만 그건 시작점일 뿐이에요. 바로크 시대에 악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템포를 어떻게 잡았는지 아는 건 연주에 필요한 ‘기본 틀’에 불과해요. 동시대적 해석은 오늘의 연주자가 악기를 손에 쥐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되니까요.” (미하엘 헬)
아트하우스17의 무대는 관습을 깬다. 바로크 시대엔 없던 악기, 1829년 빈에서 특허를 받은 아코디언이 단체의 붙박이다. 헨델의 아리아 ‘옴브라 마이 푸’를 연주할 때도 고음악의 전형을 비튼다. 비브라토(음을 떨게 하는 주법)를 덜어낸 ‘정격’ 대신 1930년대 음악가들의 방식을 택했다. 현에는 비브라토와 글리산도(음을 미끄러지듯 잇는 주법)를 듬뿍 싣고, 목소리는 한층 크고 짙게 냈다. 이 곡은 페르시아 왕이 플라타너스 나무에 바치는 노래다. 왜 이렇게 연주했을까.
“더없이 아름다우니까요. 나무를 향한 기묘한 사랑 노래가 고음악에서 익숙하게 듣던 것과 다른 소리를 입자 훨씬 더 달콤하고 아름다워졌어요. 이것이 우리가 음악에 다가갈 때 누리는 자유 중 하나예요.” (미하엘 헬)
이들의 파격은 역사를 버리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헬은 자신들의 방식을 “아주 역사적인 접근”이라고 말한다. 옛 음악가들은 작품을 다시 올릴 때 처음 공연을 그대로 되풀이하려 하지 않았다. 오페라에 새 가수가 서면 그 가수에 맞는 아리아로 바꿔 넣었다. 헬은 “언제나 그때그때 상황에 맞췄고, 그게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며 “이번 투어에서도 공연마다 소리가 다르기를 바란다”고 했다. 관습은 깨되, 음악을 늘 새로 해석하던 옛 음악가들의 태도는 이어 가는 것이다.
400년 전의 고통, 오늘의 고통
과거의 음악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담아 다시 태어난다. 17~18세기 궁정과 교회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으로, 이들은 오늘의 소수자와 이주민의 고통을 노래한다.
고음악 거장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 곁에서 20년 넘게 드라마투르그로 일한 회프트는 아르농쿠르의 말을 빌려 “고음악에 담긴 휴머니즘은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400년 전에 겪었던 고통이나 오늘날의 고통이나, 겪는 원인은 다를지 몰라도 고통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다르지 않아요. 예술 작품에 인간적 메시지가 없다면 그 작품은 연주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400년 전 인간의 문제에 내놓았던 예술적 해답을 오늘의 질문에 답하는 데 쓸 수 있어요. 이해와 다양성, 소통, 평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토마스 회프트)
아트하우스17은 고음악을 ‘병 속의 편지’라고 본다. 과거에 시간의 물결 속으로 던져진, 감정을 담은 편지라는 것이다. “200년 전, 400년 전에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어요.”
이번 투어 2부에 오르는 ‘리멤버 미(Remember Me)’는 이들의 생각을 집약한 음악극이다. 단체 측에 따르면 빈 콘체르트하우스가 홀로코스트 추모일을 위해 위촉한 작품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홀로코스트를 직접 다루기보다 이주와 망명, 실향에 관한 더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고향을 떠나 불안 속에 새 터전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챙겨 가는 기억은 선율이에요. 백 년 전에 만들어져, 새 고향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며 거듭 불린 노래들이죠. 가진 것은 잃을 수 있어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기억과 감정이죠. 그것을 붙들어 주는 음악과 선율은 희망이 언제나 있다고 말해 줍니다.” (토마스 회프트)
엄숙도 낡은 관습…숨죽인 객석을 깨우다
경계를 넘어온 이들에게 클래식 공연장의 엄숙함도 ‘낡은 관습’이다.
“바로크 시대엔 우리가 아는 의미의 콘서트조차 없었어요. 클래식 콘서트는 19세기의 발명품이에요.” (아트하우스17) 그 시절 음악은 연극의 일부였고, 권력자의 입성 의식이자 종교 의례였다. 이들이 앉아서 악기만 연주하는 관례에서 벗어나 무용과 연극, 곡예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 것도 그래서다. “소리는 표면일 뿐, 그 뒤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아트하우스17은 관객에게도 관습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들이 가장 없애고 싶은 관습은 ‘악장 사이 박수 금지’다. 교향곡은 대개 4악장, 협주곡은 3악장으로 이뤄진다. 클래식 공연장에선 악장 사이엔 박수를 치지 말아 달라는 안내가 나오기도 한다. 음악의 흐름과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서다.
“리코더의 큰 솔로가 끝났는데 음악은 계속되는 순간, 청중이 스스로 ‘지금이다’ 싶을 때 박수를 쳐 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재즈 클럽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듯이 말이죠. 물론 원치 않는 이들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요. 우린 관객과 더 감정적으로 연결되길 바랍니다.” (미하엘 헬)
웃음 역시 이들의 무대를 채우는 언어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음악극으로 꾸몄고, 지난해 위트레흐트에선 1911년 루브르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을 곡예와 유머로 풀어냈다.
“소셜미디어와 정치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논쟁하는 시대예요. 우리에겐 웃음과 유머,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 절실해요. 모두를 끌어안는 유머가요.” (토마스 회프트)
성공한 무법자는 결국 주류가 된다. 아트하우스17은 그 길을 피하지 않는다. 회프트는 “성공한 혁명은 모두 새로운 주류가 된다. 우리도 그 길 위에 있다”며 “주류가 되어 가는 중이라면,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주류가 된 뒤에도 이들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한다. “그때가 되면 또 무엇을 새로 만들어 낼지 지켜보면 되니까요.” (토마스 회프트) 단 하나, 어떤 경우에도 어기지 않는 법이 있다. 18세기의 한 음악 저술가가 남긴 말이다.
“청중을 감동하게 하려면 연주자 자신이 먼저 감동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것만은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아요. 연주하며 우리가 감동하지 않는다면, 연주할 이유가 없죠.” (아트하우스17)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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