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200주기 베토벤, ‘자유’ 화두
피델리오·말러 3·5번 대작 향연
11년만에 조성진과 협연도 계획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다시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만 서울시향과 함께일 때만 오겠다고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비유럽권 오케스트라 최초로 체코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축제’의 개막 무대를 맡게 된 ‘사건의 시작’엔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 음악감독의 ‘조건’이 있었다.
얍 판 츠베덴 감독은 1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열린 ‘2027 서울시향 시즌 오픈’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으로 ‘프라하의 봄’ 초청의 전말을 밝혔다.
시간은 지난해 5월로 되돌아간다. 당시 츠베덴 감독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프라하의 봄’ 무대에서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했다. 무대 이후 축제 측이 재초청 의사를 타진하자 츠베덴 감독은 서울시향과 함께가 아니라면 오지 않겠다고 답했다. 츠베덴 감독은 “축제 측이 ‘그것이 당신의 요구라면 우리에게도 요구가 있다’며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á vlast)’으로 개막 공연을 맡아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1946년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의 기일인 매해 5월 12일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으로 막을 연다. 베를린 필하모닉도 2024년에야 처음 이 개막 무대에 섰다. 서울시향은 내년 같은 날에 제82회 축제의 문을 연다. 이에 앞서 4월 22~2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나의 조국’ 전곡을 먼저 선보이고, 빈 콘체르트하우스, 로마 산타 체칠리아 등을 거쳐 프라하에서 유럽 투어를 마무리한다.
츠베덴 감독은 “‘나의 조국’을 지휘해 본 적은 없지만, 새로운 작품을 알아가는 것은 지휘자에게 매우 큰 영감을 주는 일”이라며 “단순한 객원 악단이 아니라 개막 공연을 맡고, 그 무대가 유럽 전역에 방송된다는 점에서 서울시향에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동행 4년 차를 내딛는 거장과 악단의 단단한 결속이 일궈낸 쾌거다.
비즈니스 파트너 넘어 ‘가족’으로…“소리는 뒤에서부터”
2024년 부임해 어느덧 임기 반환점을 돈 츠베덴 감독에게 지난 3년은 ‘관계의 진화’를 체감한 시간이었다. 지난 8월 유럽 투어의 마지막 일정이던 암스테르담 연주회를 마친 뒤 투어를 기념한 자리는 특히나 그랬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온전히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파트너십이 돼 가고 있다”며 “무대 위에서 연주만 하는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라 정말 가족과도 같은 단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서울시향은 지난 8월 유럽 투어의 마지막 일정이던 암스테르담 연주회를 마친 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춤을 추며 투어를 기념했다.
유대감은 사운드의 진화로 이어졌다. 츠베덴 감독이 바라보는 부임 초기와 현재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상호 경청’과 ‘사운드 밸런스’였다.
츠베덴 감독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음악을 경청하고 함께 연주하는 것”이라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더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운드 빌딩을 예로 들며 구체적인 음향의 변화를 설명했다. 츠베덴 감독은 “베를린 필의 경우 소리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부터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위해 첫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제1바이올린 16명, 제2바이올린 14명, 첼리스트 12명이 연주할 때 지휘자와 가장 가까운 앞자리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서부터 나오는 조금 더 다른 사운드의 밸런스를 원해요. 이런 사운드가 나오려면 연주자들이 서로를 잘 이해해야 가능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향상됐어요.”
츠베덴 감독이 그리는 서울시향은 ‘카멜레온’ 같은 악단이다. 거대한 말러를 연주하면서도, 모차르트의 고전 시대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을 갖추는 것이 이 오케스트라에 대한 나의 비전이었다”며 “단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놀라울 만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바그너와 모차르트는 물론 현대음악까지 아우르며 이곳에서 꿈을 더 펼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성진 11년만 귀환·‘15세 신동’ 히마리…베토벤과 ‘자유’
2027년 시즌, 서울시향의 화두는 ‘자유’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서거 200주년을 맞아 도출한 주제다. 츠베덴 감독은 “청력을 잃은 질병과 침묵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베토벤의 자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라고 설명했다.
무대 위의 자유는 치열한 규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츠베덴 감독의 지론이다. 츠베덴 감독은 “단원들이 종종 ‘조금만 더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자유는 정말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며 “110% 준비해야 무대 위에서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서울시향은 내년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7번, 9번 ‘합창’, 바이올린 협주곡(아우구스틴 하델리히 협연), 콘서트 오페라 ‘피델리오’ 등을 무대에 올린다. 실내악 시리즈 ‘체임버 클래식스’ 5회 공연도 모두 베토벤 작품으로 채운다.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은 3월 5번, 11월 3번으로 이어진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016년 이후 11년만에 서울시향 정기공연 무대에 돌아온다. 6월 24~25일 츠베덴 감독과 함께 5년 만에 부활한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 작곡가 신동훈의 피아노 협주곡을 아시아 초연한다. 신동훈이 조성진을 위해 쓴 곡으로, 2025년 11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조성진이 세계 초연했다. 정재왈 서울시향 대표는 “‘올해의 음악가’는 2027년과 2028년 두 해에 걸쳐 이어지며, 이 기간 신동훈 작곡가와 두 작품을 함께한다”며 “2년 동안 ‘작곡 펠로십’도 운영해 국내 작곡가들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1월 9일 신년 음악회엔 지난해 3월 만 13세의 나이로 베를린 필하모닉 정기공연에 데뷔한 2011년생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히마리(HIMARI)가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협연한다. 츠베덴 감독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바이올린 역사에서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연주자”라며 “히마리를 한국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서울시향 팀과 조직의 아주 큰 성취”라고 했다.
이 밖에도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박재홍,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Randall Goosby), 지휘자 최수열·이얼·홀리 최 등이 함께한다. 츠베덴 감독은 “다음 시즌 함께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90% 정도는 이미 함께 연주해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고 귀띔했다.
서울시향은 내년 말러 교향곡 5번(3월 4~6일), 콘서트 오페라 ‘피델리오’(세아이운형문화재단 공동 주최 특별음악회 1회 포함),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12월 16~18일) 등 세 작품을 각각 세 차례씩 무대에 올린다. 서울시향은 국내 오케스트라가 동일 레퍼토리를 세 차례 공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정재왈 대표는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은 시장이 협소하다 보니 모험도, 도전도 하지 못했다”며 “과연 3회 공연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이 커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 횟수를 늘린 배경엔 연간 100회에 달하는 시민 공연이 있다. 정 대표는 “연간 140여 회 공연 중 거의 100회가 ‘우리동네 음악회’, ‘퇴근길 콘서트’, ‘강변음악회’ 같은 아웃리치 공연”이라며 “‘클래식의 문턱이 높다’는 건 예전 이야기다. 3회 공연이 성공한다면 횟수를 더 늘려갈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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