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경감에서 2024년 치안정감까지

18년간 880회 방송된 MBC ‘수사반장’

최불암이 꼽은 인생작이자 연기의 초석

최불암이 인생작으로 꼽는 드라마 ‘수사반장’ [MBC 제공]
최불암이 인생작으로 꼽는 드라마 ‘수사반장’ [MBC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더욱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시민과 경찰의 연결다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2012년 4월 17일, 명예 경정에서 명예 총경으로 승진한 배우 최불암은 이렇게 말했다. MBC 드라마 ‘수사반장’이 종영한 지 23년이 지난 때였다. 드라마 속 형사반장을 연기했던 배우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여전히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24년, 그는 명예 치안정감이자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에 올랐다. 1972년 명예 경감으로 처음 위촉된 지 52년 만이었다.

지난달 29일 세상을 떠난 최불암과 경찰의 인연은 54년간 이어졌다. 경찰청은 같은 달 31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고인을 추모하는 사진과 글을 올렸다. “1972년부터 5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명예 경찰관으로 활동해 주신 최불암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그가 “오랜 시간 함께하며 경찰의 명예를 빛내주셨다”며 “경찰을 향한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헌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했다.

명예 경감에서 치안정감까지…52년간 다섯 번 승진

고인에게 명예 계급은 다섯 차례 주어졌다. 1972년 명예 경감으로 첫 위촉된 뒤 1977년 명예 경정, 2012년 명예 총경, 2018년 명예 경무관, 2021년 명예 치안감, 2024년 명예 치안정감으로 차례로 승진했다. 마지막 위촉 때는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이라는 보직도 맡았다. 실제 경찰 조직의 계급과 지휘권을 갖는 자리는 아니지만, 민간인으로는 명예 치안정감에 오른 최초의 기록이다.

경찰이 최불암에게 계급장을 수여한 것은 그가 오래도록 연기한 배역 중 하나가 ‘수사반장’의 형사 박영한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 3월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수사반장’은 1989년 10월 12일까지 18년간 880회 방송된 한국형 TV 수사극의 대표작이다. 순간 최고 시청률은 70%를 넘나들었다. 강력범 870여명을 검거한 최중락 전 총경이 자문을 맡아 실제 사건을 극으로 옮겼고, 윤영남이 작곡하고 재즈 타악기 연주자 류복성이 연주한 시그널 음악은 안방극장의 상징이 됐다.

경찰청이 지난 30일 배우 최불암 씨의 별세에 애도를 표했다. [경찰청 제공]
경찰청이 지난 30일 배우 최불암 씨의 별세에 애도를 표했다. [경찰청 제공]

‘수사반장’은 범인을 잡는 과정만 보여주는 수사물이 아니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 가난과 욕망, 가족의 해체와 사회적 불평등이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봤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사연을 부여했고, 사건 뒤에 놓인 사회의 그늘을 함께 비췄다. 최불암은 생전 인기 비결을 묻는 말에 수사물 이전에 휴머니즘이 담긴 사회고발 드라마였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박영한은 당시 시청자에게 익숙한 형사의 얼굴을 바꿨다. 설정상 50대 베테랑 수사반장이었지만, 배역을 맡은 최불암은 1971년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은 인물을 연기한 것이다. 트렌치코트 자락을 여미고 담배를 문 채 사건 현장을 살피는 모습은 ‘한국의 콜롬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박 반장의 힘은 외양에만 있지 않았다. 범인을 향해 호통치기보다 낮은 목소리로 사연을 끌어냈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서도 범죄에 이른 인간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가 길어진다”는 대사가 오래 회자하는 것도 그가 범죄를 개인의 일탈에만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불암의 ‘인생작’…“연기 초석 다진 작품”

최불암은 ‘수사반장’을 평생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 2007년 펴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에서 그는 ‘수사반장’을 자신의 “연기를 다진 초석 같은 작품”으로 돌아봤다. 특히 그는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지금까지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썼다. ‘전원일기’가 자신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비상시켜 준 빛나는 날개였다면, ‘수사반장’은 배우 최불암의 토대를 만든 작품이었다. 2017년 KBS 2TV ‘1대100’에서도 그는 ‘수사반장’을 젊은 시절 열심히 했던 작품으로 언급했다. 오랜 세월 ‘국민 아버지’와 ‘김 회장’의 이미지로 기억됐지만, 배우 최불암에게 가장 깊이 남은 배역은 형사 박영한이었다.

배우 최불암 [서울시 제공]
배우 최불암 [서울시 제공]

그가 연기한 형사의 영향력은 드라마 바깥으로도 이어졌다. 경찰은 ‘수사반장’이 방영되던 1972년 최불암을 명예 경감으로 위촉했다. 1977년 명예 경정으로 승진한 뒤 35년간 계급은 그대로였다. 2012년 경찰청은 최불암과 연출자 이연헌을 명예 총경으로 승진시키며 ‘수사반장’이 경찰 수사의 상징적 의미를 담은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당시 경찰청은 형사소송법 개정 등으로 경찰 수사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드라마 제작진의 공로를 기리는 차원에서 승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은 종영한 지 23년이 지났는데도 경찰을 대표하는 드라마를 꼽으라면 여전히 ‘수사반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승진은 2018년 명예 경무관, 2021년 명예 치안감으로 이어졌다. 2021년에는 ‘수사반장’ 방영 50주년을 맞아 초대 명예 형사국장에 위촉됐다. 당시 명예 수사국장직을 제안받았으나 “난 평생 형사”라며 형사국장 보직을 택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2024년 6월에는 명예 치안정감으로 승진해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이 됐다. 경찰은 그가 마약 예방 캠페인과 미래 치안 다큐멘터리 제작 등에 참여한 공로도 인정했다. 2023년에는 마약 근절 캠페인 ‘노 엑시트’의 첫 주자로 나서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마약이 이렇게까지 확산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반성과 더불어, 마약을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참여했다”고 밝혔다.

한국 대중문화에 남은 ‘원형’ …충성 대신 ‘안녕’

‘수사반장’은 종영 이후에도 한국 대중문화에 남은 하나의 원형이었다. 2024년 MBC는 원작의 프리퀄(전사)인 ‘수사반장 1958’을 선보였다. 박영한 반장이 반장이 되기 전, 1958년을 배경으로 젊은 형사 시절을 그린 작품이다. ‘열혈사제’의 박재범 작가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하고 김영신 작가가 극본을, 영화 ‘공조’의 김성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이제훈이 젊은 박영한을 연기했고, 이동휘·최우성·윤현수가 각각 김상순·조경환·서호정 역을 맡았다. 원작에서 형사들의 배역 이름에 실제 배우들의 이름을 반영했던 설정을 이어받아 옛 수사반의 기억을 되살렸다. 남성훈 역시 종남경찰서의 막내 순경으로 등장했다.

배우 최불암. [초록 어린이재단]
배우 최불암. [초록 어린이재단]

최불암은 첫 회에 노년의 박영한으로 특별출연해 35년 만에 트렌치코트를 다시 입었다. 드라마는 은퇴한 형사 박영한이 경찰서에 근무하는 손자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손자에게 간식과 갈아입을 양말을 챙겨 온 그는 벽에 걸린 옛 동료들과의 사진을 바라본다. 화면은 1958년으로 넘어가 젊은 박영한의 시간을 펼친다. 원작의 주인공이 새로운 배우에게 자리를 내주는 순간이자, 최불암이 만든 박영한의 시간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제작발표회에서 이제훈은 최불암 앞에서 젊은 박영한을 연기하는 것이 떨렸다고 털어놨다. 최불암이 건넨 조언은 “박영한은 안에 화가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이제훈은 외모나 말투를 흉내 내기보다 정신과 마음을 계승하려 했다고 밝혔다. 최불암의 박영한이 오랜 수사 경험으로 인간의 사정을 헤아리는 완성된 형사였다면, 이제훈의 박영한은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부딪히며 성장하는 청년이었다.

‘수사반장 1958’의 마지막 회는 원작과 새 작품을 잇는 작별의 장면으로 마무리됐다. 노년의 박영한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 형사들의 묘지를 찾았다. 김상순, 조경환, 서호정, 남성훈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비석에 꽃을 놓았다. “자네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온다”고 말한 그는 동료들에게 거수경례 를 올린 뒤 “충성” 대신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2024년 5월 18일 방송된 최종회는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시청률 10.6%를 기록했다. 그 장면은 작품 속 박영한의 작별이면서, 18년간 시청자와 함께한 최불암의 대표 배역을 향한 마지막 인사처럼 남았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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