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 잇 투 더 월드’ 저자 데이비드 사브란
“한국 배우의 뛰어난 재능 미국 빼면 최고”
‘쿨한 한국’이라는 브랜드, K-뮤지컬 성공의 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인간의 피부 같은 인조 가죽을 덮은 휴머노이드 로봇. 진화를 거듭해 날마다 새 버전이 나오는 이곳은 근미래의 서울이다. 로봇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도시의 풍광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낡은 아파트, 나뭇결이 살아 있는 문밖에서 ‘저기요’ 하고 부르면 어김없이 그 소리가 안까지 흘러드는 곳. 한국판 ‘어쩌면 해피엔딩’이 그린 무대는 휴머노이드를 들여놓고도 사람 냄새 나는 옛 동네였다.
브로드웨이로 건너간 이 뮤지컬은 완벽하게 미래 도시를 입었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금속성 공간, 홀로그램으로 과거도 미래도 되살려내는 최첨단 기술이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집이 됐다. 이곳에서 둘은 사랑을 배운다. 같은 이야기를 두고 한국과 브로드웨이는 전혀 다른 무대를 지었다.
“한국 밖에서 한국은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로 인식돼요. 누구나 삼성 휴대폰을 갖고 있죠. 흥미롭게도 ‘어쩌면 해피엔딩’의 무대는 브로드웨이에선 미래적이고 기술적으로 정교했지만, 한국에선 예스러운 집에 가까웠어요. 한국 밖에서는 ‘미래’와 ‘한국’을 잇는 연상이 아주 강력하거든요.”
미국의 연극학자 데이비드 사브란 뉴욕시립대(CUNY) 대학원센터 석학교수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사브란 교수는 미국 연극·뮤지컬과 대중 문화를 이론화해 온 학자다.
사브란 교수는 “미국인은 K-팝은 알아도 판소리는 모른다”며 “서울이라는 배경을 빼면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가 미래에 놓여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현재인 듯 보일 만큼 닮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기술이 움직이는 ‘가까운 미래’. 사브란 교수는 ‘어쩌면 해피엔딩’이 “이 세계를 아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고 평했다.
2011·2012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을 지낸 사브란 교수는 2024년 펴낸 저서 ‘텔 잇 투 더 월드(Tell It to the World)’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책의 두 축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상업 거점이 된 한국과 독일이다. 사브란 교수는 오는 7일 서울 세텍에서 열리는 ‘2026 글로벌 뮤지컬산업 학술대회’에서 ‘세계 무대 위의 한국 뮤지컬’을 강연한다. 이번 방한은 2013년, 2017년에 이어 세 번째다.
사브란 교수는 “이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게 2012~2013년이니, 오랜 시간 지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엄청난 투자였다”며 “그동안 한국 음악과 뮤지컬, 연극, 문화에 점점 빠져들었고, 이 작업이 나를 다시 한국으로 이끌어 주길 바랐다”고 돌아봤다.
“내가 본 최고의 뮤지컬 배우는 한국에”
사브란 교수가 한국 뮤지컬에 눈을 돌린 건 한국인 제자들 덕이었다. 첫 한국인 박사과정 제자가 한국에서 공연된 뮤지컬 ‘드림걸즈’로 논문으로 썼다. 흑인 여성 그룹의 이야기를 흑인 음악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브란 교수는 “그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된다는 데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며 “제자들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다”고 했다.
사브란 교수가 본 한국 뮤지컬의 가장 큰 힘은 배우였다. 그는 “지금껏 본 뮤지컬 배우 가운데 한국 배우들이 최고“라고 강조했다. ”예외가 있다면 미국 정도”라는 것이다. 특히나 “재능과 전문성의 수준이 놀랍고, 그 바탕에는 훈련 과정이 있다”고 봤다. 사브란 교수는 “한국 뮤지컬을 볼 때마다 배우들의 전달력, 노래와 연기, 춤을 모두 갖춘 ‘트리플 스렛’에 감동받았다”며 “그것이 거대한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뛰어난 기량의 한국 배우들이 서는 K-뮤지컬의 터전은 브로드웨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브란 교수는 “한국인들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어법을 가져다 변용하는 데 독보적으로 능숙하다”며 “미국식 양식을 성공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어떤 면에서는 독일인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봤다.
사브란 교수는 한국과 독일이 뮤지컬을 수용하는 출발선이 달랐다고 본다. 독일은 이미 ‘오페레타’라는 대중 음악극의 전통이 있었기에 뮤지컬을 ‘미국판 오페레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반면 한국은 ‘창극’ 장르가 존재하나 “뮤지컬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것, 미국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설명했다.
“2013년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뮤지컬 포스터마다 영어 단어가 딱 하나, ‘뮤지컬(musical)’만 적혀 있던 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어요. 다른 말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뮤지컬’ 그대로 받아들였죠. 이름 그 자체와 ‘브로드웨이’의 명성이 한몫했다고 봅니다.”
‘쿨한 한국’이라는 브랜드
지난해 토니상을 휩쓴 ‘어쩌면 해피엔딩’과 함께 세계 무대도 K-뮤지컬을 다시 보고 있다. 이미 K-팝, K-드라마, K-영화가 세계를 사로잡은 요즘, 한국은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이미지를 입었다.
사브란 교수는 “한국은 스스로를 알리는 일에 유난히 성공했다”며 “‘브랜드 코리아’는 전 세계에서 알려지고 사랑받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것이 한국 뮤지컬이 해외에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짚었다.
“2013년 K-팝을 중심으로 그 조짐을 봤지만, 그 뒤로 폭발했다고 느낍니다. K-팝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와 드라마, 음식까지요. 제가 주로 사는 베를린엔 3년 전만 해도 거의 없던 한국 식당이 지금은 아주 많아요. 다른 어떤 아시아 나라도 이렇지 않죠. 중국과 일본에서 만난 이들도 ‘한국은 정말 쿨하다’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인 작가 박천휴와 미국인 작곡가 윌 애런슨이 함께 쓴 작품이다. 한국에서 지원을 받았고, 미국에서 워크숍을 거쳐, 한국 초연으로 관객과 만났고, 브로드웨이로 향했다. 대부분의 K-뮤지컬은 제작사가 판권을 갖지만, 이 작품은 창작자들이 판권을 쥐고 세계 무대로 나아갔다.
사브란 교수는 “초국가적 뮤지컬을 만들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이 매우 중요하다”며 “‘어쩌면 해피엔딩’은 훨씬 똑똑하고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봤다.
“한국 이야기를 더 들려주길”
사브란 교수가 인상 깊게 본 한국 뮤지컬은 ‘영웅’과 ‘서편제’다. 처음 실연으로 본 한국 뮤지컬이 ‘영웅’이었다. 사브란 교수는 “그 역사를 전혀 몰랐는데도 무척 감동했고, 아주 능숙하게 만든 작품이었다”며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 뮤지컬의 관습을 많이 쓴 작품”이라고 했다. ‘서편제’는 사브란 교수가 이 책을 쓰게 한 작품이다.
“2017년에 본 ‘서편제’는 극장에서 겪은 가장 강렬한 경험 가운데 하나였어요. 판소리는 조금 알았지만 소리꾼이 어떻게 수련하는지는 전혀 몰랐는데, 이 작품이 저를 깊이 흔들었죠. 역대 가장 위대한 뮤지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브란 교수는 책에서 ‘서편제’를 비롯한 한국 뮤지컬을 ‘한(恨)’이라는 개념으로 엮어 읽었다. 그는 “처음엔 이 말을 쓰는 게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한을 일제강점기의 경험과 연결하는 시각도, 스스로를 동양적 타자로 꾸민다는 ‘자기 오리엔탈리즘’ 비판도 알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그가 ‘한’에 주목하는 것은 무대가 안긴 감정 때문이었다. “수많은 한국 뮤지컬, 특히 ‘서편제’는 제게 아주 독특한 슬픔을 안겼어요. 그 슬픔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제게는 그게 납득이 됐습니다.”
한국적 소재의 뮤지컬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한국 뮤지컬을 공부할수록 “서유럽 고전 원작이 이렇게 많다는 데 놀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만든 작품들이지만 한국 이야기를 더 들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 이야기를 하는 훌륭한 영화가 쌓여 있고, 신화와 민담도 있죠. 한국은 미국에서 충분히 핫하고 유행의 중심에 있어서, 더 한국적인 이야기도 팔 수 있을 만큼 관심이 큽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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