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계 성폭력 연성명 하루 만에 1900명
입시·채용·섭외의 위계 직시 촉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리 후배들이 스승을 두려워하지 않고 존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승에게 배우고, 스승의 추천으로 무대에 오르며, 스승의 눈 밖에 나면 설 곳을 잃는 세계. 그 단단한 사제(師弟)의 고리가 성폭력을 가리는 장막이 돼 왔다는 고백이 국악계 안에서 터져 나왔다.
8일 전통공연예술인 긴급행동(공동대표 김희선·백소망)에 따르면 이 단체가 지난 7일 오전 10시 30분 공개한 ‘국악계 성폭력 문제에 관한 공동성명’에는 8일 오전 11시 기준 1900명 넘는 이들이 연서명했다. 공개 약 하루 만이다. 학생 참여자도 500명을 넘었다. 국악계 종사자뿐 아니라 공연예술계와 학계, 예술교육 현장의 구성원들이 이름을 올렸고, 서명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타고 번졌다.
제안자 명단이 성명의 무게를 더한다. 이지영·허윤정·김정승 서울대 교수, 강은일 단국대 교수, 류경화·전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현직 교수와 연주자, 비평가, 연출가, 방송 PD, 기획자 30명이 이름을 내걸었다. 입시와 채용, 심사의 열쇠를 쥔 자리의 이들이 스스로 구조의 문제를 꺼내 들었다.
한 달 새 쏟아진 고발…“미투 때도 침묵했다”
지난달부터 국악계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 A씨는 중학생 때부터 가르쳐 온 제자를 송년회 자리에서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벌금 300만 원의 약식명령을 청구했으나, 피해자는 정식 재판을 요청했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선 3학년이던 남학생 2명이 지난해 5월 경기 안양의 한 음악 연습실에서 동급생을 성폭행하고 불법 촬영한 혐의(특수강간 등)로 지난 1월 검찰에 불구속 송치됐다. 두 학생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절차가 늦어지는 사이 아무런 조치 없이 졸업해 대학에 진학했다. 피해 신고부터 학폭 사안 종결까지 291일이 걸렸다.
사안은 국회 국정감사로 번졌다. 국립전통예술고를 관할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최휘영 장관은 지난달 23일 국감에서 “문체부 장관으로서 너무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고개를 숙였다.
고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대통령상 수상 경력의 유명 국악 연주자가 미성년 제자를 4년여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고소장이 경찰에 접수됐다. 연주자 측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교육대학원에서 국악을 가르치던 초등학교 교감이 대학원생을 강제추행해 벌금형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사제 관계를 이용한 국악인 성범죄 판결문 11건 가운데 7건은 미성년 제자가 피해자였고, 그중 4건은 피해자가 13세 미만이었다.
성명에선 2018년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를 휩쓸 때도 국악계는 침묵하고 방관했다는 자기 고백도 담겼다. 좁은 업계에서 피해자이자 고발자가 되는 일은 곧 낙인이었고, 그 낙인이 피해자를 국악 밖으로 밀어냈다는 진단이 뒤따랐다.
레슨실·입시·전수소…위계가 만든 침묵
판결문 속 범행은 대부분 레슨실과 교실에서 벌어졌다. 입시를 앞둔 학생에게 스승은 실기 선생이자 추천인이고, 때로는 심사위원이다. 유명 연주자 고소 사건에선 연주자의 아내가 피해자의 고교 전공 교사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레슨실과 학교, 입시가 한 줄로 이어진 셈이다. 무형유산 전승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스승의 추행을 문제 삼은 한 제자는 ‘인간문화재가 되려고 음해했다’는 비난과 냉대를 견디다 못해 전수소를 떠나야 했다.
성명에서도 세 가지 요구를 담았다. 우선 학교와 소속 기관, 예술단체가 피해 제기를 접수하면 신속하고 독립적으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확인된 성폭력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라고 촉구했다. 동료의 명성과 공로, 사제 관계를 이유로 책임을 피하지 말라는 문장도 들어갔다. 다음은 국악계 내부의 자성이다. 성폭력을 개인의 일탈로만 돌리면 피해를 말하기 어렵게 만든 입시·채용·추천·섭외의 관행과 위계는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마지막 요구는 정부와 공공기관을 향한다. 문체부와 교육당국, 국공립기관에 학교와 대학, 개인레슨, 국공립단체, 공연 현장을 아우르는 실태조사를 요구했다. 피해자를 지도·평가하거나 공연 섭외를 결정하는 사람을 거치지 않는 독립적 신고·상담 창구, 조사 과정의 이해관계자 배제, 미성년 피해자 보호조치, 사제 간 개인레슨 운영 기준과 예방교육, 입시·채용·오디션의 이해충돌 관리 기준이 구체적 과제로 제시됐다. 가해가 확인된 이를 공연·교육·심사·채용에서 배제하고, 담당 기관과 이행 일정을 공개하라는 요구도 포함됐다.
8년 전 대책은 왜 닿지 않았나
이러한 요구가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2018년 미투 운동 당시 문체부와 국가인권위원회는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특별조사단을 100일간 운영했고, 전담기구 설치와 가해자에 대한 공적 지원 배제 등을 정책 과제로 내놨다. 이후 분야별 신고·상담 창구도 마련됐다. 그러나 8년이 흐른 지금도 국악계의 피해자들은 진로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신고를 미뤄 왔다. 성명이 ‘사후 대응’이 아닌 ‘상시 보호’를 거듭 앞세우는 이유다. 레슨실과 전수소처럼 제도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공간에서 피해를 어떻게 먼저 발견할지가 과제로 남았다.
한 참여자는 “피해자의 공론화가 없어도 즉각 작동하는 상시적 보호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적었다. 국악인이 아니라고 밝힌 또 다른 참여자는 예술교육을 받으며 비슷한 일이 선후배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지켜봐 왔다고 털어놨다.
긴급행동은 2주간 연서명을 받는 한편, 공개 포럼과 토론회로 현장 의견을 모아 정책 제언을 이어갈 계획이다. 긴급행동은 “이 공동성명은 특정 사건에 대한 일회적인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더 이상 침묵과 방관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현장 구성원들의 공통된 의지”라며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나서기 전에도 위험을 발견하고 보호할 수 있는 상시적 보호체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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