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이후 핵 위험 수위 최고조
미·러 핵전력조약 탈퇴로 규제 없어
일촉즉발의 역사적 교훈 전해
KGB자료 근거한 새로운 시각
위기로 몰고간 결정적 오판 조명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핵 위협 등 세계가 다시 핵전쟁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 핵 위험 수위라는 게 전문가들의 인식이다. 3만 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가 2019년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를 선언한 이후 규제 없는 핵무기 경쟁 즉 ‘두 번째 핵 시대’를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하버드대 교수이자 하버드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인 세르히 플로히가 지난해 4월 출간한 ‘핵전쟁 위기-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삼인)은 이런 핵위협의 고조 속에서 쿠바 사태를 다시 소환해 역사적 교훈을 전한다.
‘얄타’‘체르노빌 히스토리’를 비롯, 수십 편의 국제문제 논픽션을 출간한 세계적 석학 플로히의 이번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수많은 저작과 차별화된다.
새롭게 발굴된 소련의 문서고 자료와 우크라이나에 보관 중인 KGB자료를 활용, 당시 크렘린의 의사결정 과정과 소련의 미사일 전략· 쿠바 파견 과정의 전말을 상세하게 다룸으로써 기존 미국 시각 중심의 쿠바 사태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일촉즉발의 핵전쟁을 막은 게 무엇인지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담론은 케네디의 공으로 모아진다.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최측근 참모들이 관여한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결국 위기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폴로히는 이와 달리 핵심 인물들이 핵전쟁 위기로 몰고간 결정적인 오해와 착각, 오판의 순간들을 조명, 일을 그르친 수많은 상황들을 검토함으로써 미국 위주의 관점에서 놓치고 있는 것을 밝혀낸다.
당시 케네디는 적의 의도를 잘못 판단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경각심을 갖고 있었지만 저자에 따르면, 케네디와 흐루쇼프 둘 다 연속적으로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는 전방위적이었다. 이념적 자만과 너무 앞서간 정치 의제에서부터 상대의 전략 지정학적인 목표와 의도에 대한 오독, 인재 부족에 따른 판단 실수, 문화적 오해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웠다.
가령 케네디는 쿠바의 소련 기지를 공격하는 결정을 하면서 소련군의 숫자를 1만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사령관이자 쿠바 군작전 핵심 수립자 중 한 사람인 아나톨리 그립코프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1962년 봄, 여름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은 4만3000 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화기, 폭격기, 핵탄두를 장착하고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 외에 미국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에 핵탄두가 있다고 믿지 않았고,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동기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케네디는 쿠바의 소련 미사일에 대한 공격을 제안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의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 충격을 받았고, 조급해져 빨리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주도권을 잃은 흐루쇼프는 결국 쿠바에 있는 소련군의 통제권을 카스트로에게 잃고 말았다.
책은 흐루쇼프의 1958년 서베를린 자유도시화 선언으로 촉발된 연합국과의 무력충돌 및 핵전쟁 위기에서 시작,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1961년 빈 정상회담에서의 샅바싸움 등 흐루쇼프의 입장과 생각을 따라간다. 흐루쇼프의 최대 고민은 미국과의 미사일 무기고 격차였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 엔진도 없고 전투준비가 완료된 장거리미사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바 미사일 배치는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주피터미사일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묘책이었다. 흐루쇼프는 이로써 핵공포의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런 대응은 핵전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미국의 지각있는 정치인들은 우리가 오늘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심지어 1962년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기회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작전의 기밀성을 유지했다.
저자는 쿠바 핵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결정적 이유로 케네디와 흐루쇼프 둘 다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지목한다. 둘 다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것을 사용한다는 생각 자체를 무서워했다.
주요 변수는 카스트로였다. 소련 미사일을 쿠바가 통제하는 상황에서 카스트로는 영공을 침범한 미군 U2기를 미사일로 격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만들어냈다.
핵 충돌이 임박한 상황에서 둘은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비밀거래를 했다. 군사행동을 촉구하는 군부의 압박에 직면한 케네디는 흐루쇼프에게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쿠바의 소련 미사일 체계를 제거하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제안했고 흐루쇼프는 기꺼이 케네디의 공식 제안을 받아들였다.
먼로독트린으로 시작된 쿠바 문제는 미국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정권과 카스트로의 등장,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과 소련의 미사일 쿠바 배치, 카스트로의 영악한 셈법과 소련과 중국 관계 등 당시 정세를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조명, 20세기 현대사를 한 호흡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전 세계가 1950년대와 60년대 초를 특징 지은 핵무기 벼랑끝 전술로 다시 빠져들고 있다며 쿠바 핵전쟁 위기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핵전쟁 위기/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