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바이든 대통령 삼성 평택캠퍼스 방문 1주년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한국처럼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력해 공급망 회복력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한 지 20일로 1년이 됐다. 1년 전 삼성 반도체 라인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한국 반도체 기업간 글로벌 공급망 협력 관계를 역설하며 양국의 우호 관계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 통제와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에 따른 깐깐한 보조금 지급 조건 등이 부각되면서, 양국과 기업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결속하려는 미국 정부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 국내를 대표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반도체 사업 활로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 모색 필요성이 제기된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미국 쏠림’ 가속화
지난해 5월 20일 바이든 대통령은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내 반도체 라인을 방문해 삼성의 최첨단 칩 제작 방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에 기여하는 미국 장비 기업들의 엔지니어를 직접 만났다.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KLA, 램리서치 등 세계적인 장비 기업들의 엔지니어들이 직접 자사 장비를 소개하며, 일부로 미국 성조기까지 장비 전면에 붙여 삼성 칩 생산에 미국 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날 미국과 한국의 반도체 협력을 강조한 바이든 대통령은 “(삼성 반도체 공장의) 칩을 만드는데 쓰이는 여러 기술과 장비는 미국에서 설계되고 생산됐다”며 “이 공장은 한미 양국의 국제경제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 안정성, 안전을 유지하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미국산 장비가 한몫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미국 본토에 유치, 야심차게 칩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반도체 기술은 미국에서 시작됐다”며, 미국의 반도체 리더십 회복을 위해 관련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 본토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반도체 공급망 관련 생태계 지도를 만들어 이를 실시간으로 관리할 정도다. 이 지도에 따르면 미국 50개 주 가운데 42개 주에서 이미 반도체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거나 신규 투자(증설 포함)가 확정됐다. 삼성전자 텍사스 오스틴 파운드리(위탁생산)와 같은 제조시설 185곳, 설계와 파운드리 중간 공정을 담당하는 디자인하우스 163곳, 설계사(IP·EDA) 25곳, 연구개발(R&D) 센터가 357곳 등이다. TSMC와 인텔은 애리조나에 각각 400억달러, 200억달러의 칩 공장 투자에 나섰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텍사스(300억달러), 마이크론은 뉴욕(200억달러) 등에 생산 공장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SIA는 총투자 규모가 최소 2000억달러(약 261조 4000억원)로 3만9000개에 달하는 일자리 창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엔 미국 주도의 반도체 협력망인 ‘칩4’에 속한 일본 역시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확충에 나서 주목된다. 일본이 글로벌 기업들의 반도체 생산기지를 흡수하면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이 강화되는 효과가 생긴다. 미국 중심의 칩 생태계가 확장되는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8일 삼성전자·TSMC·인텔·마이크론 등 글로벌 반도체 생산 업체·연구기관 7곳을 상대로 대일본 투자 확대 세일즈에 나섰다. 이에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은 최대 5000억엔을 투자해 2026년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인 히로시마 공장에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에도 차량용 반도체와 이미지센서 생산을 위한 12·16·22·28㎚(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기반의 파운드리 공장을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건설하고 있다.
미국, 중국 반도체 통제 강화…패권전쟁 사이 낀 K-반도체
지난해 10월 미국이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하면서, 국내 칩 기업들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삼성은 전체 낸드플래시 반도체의 30~40%를 중국 시안에서, SK하이닉스는 전체 D램의 절반가량을 중국 우시에서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기업들은 오히려 구형(레거시) 공정이 많아 장비 수출 통제의 영향을 덜 받지만, 한국 기업들이 첨단 메모리를 중국 내에서 생산하고 있어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핀펫 또는 가펫 등 비평면 트랜지스터 구조의 16나노 로직 반도체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 기술 및 생산 장비 등에 대한 수출 통제를 단행했다. 이 가운데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와 18나노 이하 D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주력 품목이기도 하다.
다만 최근 미국 정부가 중국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비 반입기준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미국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 기술 수준 내에서 현지 공장의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 협상’은 과제…“美 공장 건설 득실 따져야”
지난 3월 초 미국 정부는 반도체법(CHIPS Act) 관련 보조금 지급 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국내 기업들에 부과하며, 부담감을 키웠다.
미국은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는 기업들에 보조금 조건으로 해당 기업의 초과 이익을 미국 정부에 반납하고 반도체 핵심 공정에 대한 접근 허용 등을 요구했다. 보조금 수혜 반도체 기업의 10년간 중국 내 반도체 설비 증설을 금지하는 가드레일 조항 역시 거론했다.
미국 상무부는 3월 중순 공개한 반도체지원법 가드레일 규칙 공지에서 향후 10년간 상대적으로 기술 수준이 낮은 레거시 반도체 생산시설의 경우 생산능력을 10%까지 늘릴 수 있는 투자를 허용하고, 기술 수준이 높은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의 경우 생산능력을 5%까지 늘릴 수 있는 투자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황철성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는 지난달 말 국회 의원회관에서 양향자 의원실 주최로 진행된 ‘美 반도체 유일주의 민관학 공동 대응 토론회’에서 “미국 칩스법 가드레일 조항 중 중국 내 공장의 웨이퍼 투입량을 10년에 5% 늘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건 사실상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통상 한장의 웨이퍼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칩 수가 증가해도 각 칩의 가격은 크게 올라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고성능 칩을 지속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원가는 올라가는 구조다. 이 경우 이익이 감소하게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칩 회사는 웨이퍼 투입량을 늘려 칩 생산량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미국이 가드레일 조항을 통해 칩 생산량 확대에 제동을 걸어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미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이 예상보다 매우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외신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짓는 반도체 공장 건설 비용이 처음 계획보다 80억달러(약 10조5500억원) 늘어난 250억달러(약 33조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설 비용 급증의 주된 이유는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SIA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대만·한국·싱가포르의 생산공장보다 10년 동안 건설·운영하는 데 약 30% 더 비싼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의 공장과 비교해도 미국이 37~50% 가량 더 비싸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반도체 공장을 더 지어 자신들이 글로벌 공급망을 거의 독점하길 바란 것”이라며 “그러나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 입장에선 오히려 비용이 더 들 수 있어, 이에 대한 미국 정부와의 지속적인 협상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