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수정 기자] “건강만 허락한다면 여든, 아흔에도 ‘벽속의 요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0년을 채웠으니 이제 몇 살까지 이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도전해 보겠습니다”
배우 김성녀가 연극 ‘벽속의 요정’ 공연을 한 것은 올해로 10년째다. 김성녀가 다섯살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1인 32역’을 해내는 모노드라마다. 대사량이 많아서 두시간 공연을 하고 나면 입에서 쥐가 날 정도라고 한다. 무대에 혼자서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김성녀는 이 연극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제일 두려운 것은 감기예요. 머리 아픈 것은 괜찮은데 코가 맹맹하거나 기침이 나올까봐…. 공연 중에 땀이 엄청 나는데 계속 옷을 갈아입다보니 으슬으슬하죠. 힘들지만 끝날 때는 관객들의 박수와 격려가 왕관처럼 씌워지는 작품이예요”
벽속의 요정은 지난 2005년 초연 당시 ‘올해의 예술상’ 등 각종 연극상을 받은 작품이다. 첫 공연 당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김성녀는 “앞으로 10년간 이 작품을 하겠다”고 공약해버렸다.
“사실 10년 딱 채우고 그만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고(故) 장민호ㆍ백성희 선생님도 구순 가까운 나이에 연극 ‘3월의 눈’을 멋지게 공연하셨는데 내가 너무 건방진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몇 년 더 하겠다’라고 하기보다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벽속의 요정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토대로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모노드라마로 만들었다. 이를 배삼식 작가가 일제강점기, 6ㆍ25전쟁 등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빨갱이로 몰려 벽 속에 40년간 갇혀지내는 아버지와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어린 시절 아버지를 요정으로 알고 자란 딸의 삶을 그렸다.
올해 예순다섯인 김성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다섯살 아이 목소리를 내거나 20대 꽃다운 처녀로 변해 살랑살랑 춤을 추는 장면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소화해낸다. 여기에 경찰, 목사 등 주변인 역할에 극중극인 그림자인형극의 ‘열두달 이야기’ 등 노래까지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저 자신도 배우,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교수 등 일인 다역을 하고 있죠. 그간 마당놀이, 뮤지컬 등 온갖 장르를 해봤구요. 이런 것이 모아져 이 작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해요. 변신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단순히 성대모사나 흉내로 그치는 게 아니라 32개 배역 모두 진정성있게 표현하는 것이 저한테는 숙제였어요”
이같은 노력이 객석에 전해져 매 공연마다 기립박수가 이어지고 있다. 스무번 넘게 이 작품을 보러오는 관객도 있었다.
“여러 역할을 맡고 있지만 배우가 제일 좋아요. 고통마저 즐기는 것이 배우거든요. 배우로서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영원한 배우’ 김성녀의 벽속의 요정 10주년 공연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16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