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의가 좋은 남매였다. 누나는 열두 살 때부터 이미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엄마의 모든 관심과 정성은 누나 차지였다. 아홉살 남동생은 혼자 집에 남겨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순둥이는 투정 한 번 부리는 법이 없었다. 누나는 그런 동생에게 늘 미안했다. “이 참에 너도 한 번 스케이트 배워볼래.” 보다 못한 엄마가 남동생까지 스케이트장에 데리고 왔다. 동생은 작은 원을 빠르게 도는 쇼트트랙이 더 멋있어 보인다며 누나와 다른 길을 걸었다. 남매는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동반 금메달을 땄다. “3년 뒤 소치올림픽 때도 꼭 함께 금메달 따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남동생은 쇼트트랙 밖에 모르는 ‘범생이’다. 하는 일도 스케이팅, 취미도 스케이팅, 하다못해 스트레스 해소도 스케이팅으로 푼다. “거의 하루종일 스케이트만 생각한다”고 머쓱하게 웃던 그였다. “타고난 운동신경도 없어서 체력 하나로 타는 스타일”이라며 괜히 부끄러워 하기도 해다. 운명은 얄궂다. 가장 자신있어 하는 체력을 그에게서 빼앗아 갔다. 지난달 왼쪽 어깨에서 뼈암의 일종인 골육종이 발견됐다. 길이 6㎝이던 종양이 13㎝까지 자랐다. 수술대에 올랐고 고통스러운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다. 올림픽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갔다.
#8일 서울 노원구 원자력병원. 남동생 노진규(22·한체대)가 첫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2시간 동안의 항암치료를 받고 침대에 누운 채 병실로 들어가는 그는 한 눈에도 힘든 모습이 역력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창백할 정도로 굳은 표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병원 관계자는 “항암치료 초기에는 고통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라며 “그러나 노 선수는 치료받는 동안 아픈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고 했다. 1인 병실 안은 지인들이 보내온 것으로 보이는 건강음료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물건도 없는 적막한 분위기다. “수술은 잘 됐고 이제 남은 건 항암치료인데, 그 과정이 쉽진 않네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진규 상태가 좋지않아서요.” 남매의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진다. 딸은 소치에 보낸 채 아들이 누워 있는 병상을 홀로 지킨다. “제가 어떤 말을 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네요. 아픈 진규도 그렇고, 선영이도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린다.
#9일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 빙상장. 누나 노선영(25·강원도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궜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 여자 3000m에서 4분19초02로 25위에 그쳤다.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물이 차 올랐다. 한국을 떠나기 전 병원을 찾아갔지만,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는 모습만 보고 나왔다. “며칠 전 통화에서 선물을 사오라고 하기에 사갈 만한 것이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메달을 가져오라’며 웃더라고요.” 그 힘든 병상에서도 누나에게 웃음을 준 동생이다. 남매의 메달 약속은 현재진행형이다. 누나는 21일 김보름(한체대)ㆍ양신영(전북도청)과 출전하는 팀 추월에서 메달을 노린다. 그는 “반드시 메달을 들고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동생은 병상에서 누나의 경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TV중계로는 볼 수가 없었다. “누나는 보여주지도 않네….” 자신의 SNS에 서운한 마음을 드러낸 노진규는 10일 저녁 또 다른 메달을 기대한다. 남자 쇼트트랙 1500m. 노진규가 월드컵에서 맹활약해 대표팀에 올림픽 출전권을 안긴 종목이다. 신다운 이한빈 박세영은 “금메달을 따서 꼭 노진규의 목에 걸어주겠다”고 했다. 얼음 트랙보다 더 차가운 병실 안. 그러나 누나와 동료들의 메달 약속에 노진규는 오늘도 행복한 꿈을 꿀 것같다.
조범자 기자ㆍ서상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