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국제구조위원회(IRC) 공동 기획
<기후재난, 우리가 외면한 피해자들①-시리아>
자연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명제는 틀렸다. 그 누구보다 철저히 가난을 가려내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막대한 화석연료를 태우며 경제성장을 이룬 곳이 있다. 그리고 온실가스가 만든 폭염과 가뭄, 홍수의 대가를 온몸으로 받는 곳이 따로 있다.
이른바 기후변화의 피해자들이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은 누구인가. 구분이 다소 모호할지라도, 책임의 무게가 다르다는 점은 명확하다.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고, 그만큼 풍요로운 삶을 축적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후변화는 여전히 ‘불편’의 영역에 가깝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미 ‘생사’의 영역이다. 기후위기가 불러온 재난으로 한순간 집과 일터를 잃고, 끼니를 줄이고 질병에 시달리며,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한다.
피해자 다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헤럴드경제는 이번 기획에서 현지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국내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해외 기후위기 피해자들의 실제 삶을 따라간다.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10살 난 아들의 몸에 열이 끓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에 남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병원에 갈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돈을 쓰고 난 다음이었다.
곧바로 다음 농사를 준비해야 했다. 씨앗을 사고 비료를 마련해야 한다. 농기계를 움직일 연료도 필요했다.
지난 농사를 망친 게 시작이었다. 집안 살림이 빠듯해졌다. 끼니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도 이전처럼 쓸 수 없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다음 농사의 규모가 더 줄어든다. 그 다음 상황은 뻔하다. 하루에 1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나날이 찾아올 터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꼬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밀과 보리를 심었다. 언제쯤 비가 내리고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배웠고,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며 익힌 일이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먼저 씨를 뿌렸다가, 물을 만나지 못하면 어렵게 마련한 종자는 그대로 버려진다.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다가는 파종할 시기를 놓치게 된다.
뒤늦게 씨앗을 심었고, 돌아온 곡식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한 해 농사에 쓴 돈은 그대로인데, 손에 들어온 돈은 줄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음 농사를 지을 돈이 없었다. 씨앗을 살 돈도, 연료를 마련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먹여 살릴 자신이 없었다.
부부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땅이었다.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린 밭. 마지막 재산을 처분하고, 아이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아이는 얼마 전 유럽으로 떠났다.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국경을 넘는 위험한 밀입국이었다. 길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보내야 했다. 이곳에 남겨두는 것보다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땅을 팔고 아이까지 떠나보낸 뒤, 부부의 생계를 다시 꾸리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아이가 떠난 자리에는 부부만 남았다. 함께 먹던 식탁에도 한 사람의 몫이 사라졌다. 아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알 길이 없다. 무사히 국경을 넘기를 바랄 뿐이다.
농사를 지을 때와 다를 건 없었다. 부부는 오지 않는 비를 기다리듯, 묵묵히 아이의 소식을 기다린다.
위 내용은 헤럴드경제가 국제구조위원회(IRC) 활동가들이 시리아 현장에서 접한 농민들의 사연과 시리아 북동부에서 확인된 미성년자 비정규 유럽 이주 사례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현지에서는 반복되는 가뭄과 불규칙한 강우로 생계가 무너지고, 식비·의료비까지 줄여야 하는 농민들이 적지 않다. 끝내 농지를 팔아 가족을 유럽으로 보내는 위험한 선택에 내몰리는 사례도 있다.
“당연한 일상이 사라졌다” 가뭄에 생계 흔들려…가족과 생이별까지
시리아에서 농업·생계 지원 업무를 맡고 있는 마지드 압드 알 카림 무슬리트 IRC 농업 프로그램 선임 매니저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현지 농민들이 겪는 가장 큰 변화로 예측하기 어려워진 강우와 반복되는 가뭄을 꼽았다.
농업 엔지니어인 마지드는 10년 넘게 농업·생계 지원 분야에서 일해왔다. 그가 지난 7년간 지켜본 시리아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어떤 농민은 마지드에게 “소셜미디어에서 접하는 뉴스는 온통 거짓말이다. 일기예보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만큼 과거의 경험이나 일기예보만으로 농사 시기를 판단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마지드는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강수량과 강우 패턴”이라며 “우기가 시작되는 시기가 늦어지고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강우 시기를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폭염도 빈번해지며 농작물과 수자원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밀과 보리를 비롯한 주요 겨울작물을 통상 10월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파종했다. 최근에는 비가 늦게 내리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파종 시기를 12월까지 미루는 농민들이 생겼다. 가뭄이 반복되면서 많은 지역에서 지하수를 얻기 위해 이전보다 더 깊은 우물을 파야 한다.
일부 농민들은 여러 해 연속 가뭄을 겪은 뒤 자신의 농지를 직접 경작할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해 다른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종자와 비료, 연료 등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비용까지 크게 오른 상황이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농민들의 얘기도 다르지 않다. 시리아에서 42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안와르(가명)는 지난 2023년 인터뷰에서 “비가 많이 오면 수익을 내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며 “2019년에는 비가 많이 와 수확도 좋았지만 이후 3~4년 동안은 계속 손해를 봤다. 2021년 겨울은 마치 여름 같았고 매일 해가 쨍쨍했다”고 덧붙였다.
시리아 전체 경작지의 4분의 3 이상은 강우에 의존한다. 비가 늦게 내리거나 충분히 내리지 않으면 그에 따른 손실을 고스란히 농민이 떠안는 구조다.
농사를 망치면 식비와 의료비 등 생활비부터 줄어든다. 다음 농사도 흔들린다. 마지드는 “종자와 연료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경작 면적을 줄이거나 농지를 임대·매각하는 농민들도 봤다”고 설명했다.
이마저도 버티지 못하면, 결국 삶의 터전을 떠난다. 마지막 재산인 농지를 팔아 가족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유럽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해, 농지를 매각한다. 위험할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이 드는 여정이다.
마지드는 “기후변화는 단순히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농촌 지역 가정의 안정과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40년 새 최악 가뭄…곡물 생산 60% 넘게 줄었다
마지드가 전한 사연은 일부 농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리아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위기의 규모는 더 선명해진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해인 2025년 시리아는 수십 년 만의 심각한 가뭄을 겪었다. 2024년 11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강수량은 장기 평균보다 50% 이상 적었다. 그 결과 지난해 시리아의 곡물 생산량은 최근 평균보다 60% 이상 줄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기후충격을 받아낼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
10년 넘게 이어진 분쟁으로 시리아 곳곳의 기반시설은 크게 훼손됐다. 세계은행은 2011~2024년 시리아의 인프라와 주거·비주거 건물에 발생한 직접적인 물적 피해를 약 1080억달러로 추산했다. 이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약 2160억달러로, 2024년 추정 국내총생산(GDP)의 약 10배에 달한다.
식량 문제는 이미 현실이 됐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시리아에서 약 720만명이 급성 식량불안을 겪고 있으며, 이 중 160만명은 심각한 수준이다. 상당수 가구는 식사량을 줄이거나 끼니를 거르며 버티고 있다.
결국 같은 가뭄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재난이 아니다. 이미 분쟁과 빈곤으로 버틸 힘을 잃은 사람에게 떨어진 기후충격은 생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마지드는 “농민들은 가뭄과 예측하기 어려운 강우, 기온 상승에 직면해 있는 동시에 훼손된 농업 기반시설, 지뢰 오염, 물가 상승, 제한적인 물과 관개시설 접근성, 높은 연료·종자·비료 비용, 종자를 비롯한 농업투입재의 부족과 품질 문제까지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공평한 기후재난…가난을 먼저 덮쳤다
시리아 농민들의 현실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지금 기후위기의 가장 큰 피해를 떠안고 있는 국가들이 이 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국가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에 따르면 1850~2019년 화석연료 사용과 산업에서 발생한 누적 이산화탄소 배출량 가운데 선진국이 차지한 비중은 57%다. 반면 최빈개도국이 차지한 비중은 0.4%에 그쳤다.
산업화를 먼저 시작한 국가들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고, 동시에 재난 피해를 줄일 사회 기반을 갖출 여력도 키웠다. 하지만 온실가스의 영향은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피해 역시 똑같이 나눠지지 않는다.
IRC가 2024년 분석한 기후변화와 분쟁의 영향을 동시에 크게 받는 17개국에는 세계 인구의 10.5%가 거주한다. 이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연간 배출량의 3.5%에 불과하다. 시리아도 이 17개국에 포함된다
반면 전 세계에서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71%, 자연재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의 약 3분의 1이 17개 국가에 집중돼 있다. 풍요를 만든 곳과 그 대가를 먼저 치르는 곳이 다른 셈이다.
그런데 피해를 줄이는 데 필요한 돈조차 가장 취약한 곳에 충분히 흘러가지 않고 있다. IRC가 지난해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기후·분쟁 취약 17개국은 2022년 개발도상국에 배정된 기후적응 재원의 12%만 받았다.
한국 역시 이 구조와 무관한 국가는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연료 연소에 따른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0.6t으로 OECD 평균 7.8t보다 많았다.
한국에서 배출한 탄소와 시리아의 특정 농가가 겪은 가뭄을 일대일로 연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도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렸고, 지금의 기후변화를 만들어낸 세계적인 배출 구조 밖에 있지는 않다.
“기후변화, 단순한 날씨 문제 아냐…현실 알아야”
그렇다면 시리아 농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지드는 한 차례의 가뭄이 끝날 때까지 식량이나 종자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현재 농민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마지드는 “가장 답답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농사를 계속 짓고 싶어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농민들을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원 기간 역시 문제다. 그는 “많은 프로젝트가 한 번의 농사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농민들이 겪는 문제는 장기적”이라며 “여러 해에 걸쳐 가뭄을 겪은 농민들에게는 단순한 종자 지원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IRC가 시리아에서 운영하는 ‘종자 안보(Seed Security)’ 프로그램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다.
여기서 말하는 종자 안보 프로그램은 단순히 농민에게 씨앗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다. 농민들이 현지 환경에서 다양한 품종을 직접 시험·생산하고, 생산한 종자 일부를 다른 농민에게 제공해 품질 좋은 종자의 사용을 지역 내에서 확대하는 방식이다.
IRC는 농민들이 자신의 밭에서 직접 품종을 시험하도록 하고, 농사철 동안 교육과 작물 점검도 지원한다.
마지드 역시 이 같은 지원을 보다 장기적이고 폭넓게 이어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좋은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정작 그 해결책이 가장 필요한 농민들이 비용 때문에 이용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며 “종자 체계와 물 관리, 연구, 신뢰할 수 있는 기후정보 등 농업 시스템 전반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보면 ‘비가 제때 오지 않았다’는 하나의 기후 현상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시리아 농민에게는 한 해 수확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식비와 병원비를 줄이고, 다음 농사를 포기하고, 끝내 땅을 팔고 가족과 헤어지는 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마지드는 “한국을 비롯해 시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시리아 농민들에게 기후변화가 단순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매우 어려운 상황에 또 다른 부담을 더하는 문제”라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더라도, 예상대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국 농작물을 잃을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w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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