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폐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인용

“소명 기회 안 줬다”…위법·무효 판단

본안판결 확정 전까지 상폐 절차 중단

내년 7월 시총 기준 추가 상향도 차질

코스닥 체질 개선 정책 재검토 불가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 여의도사무소 모습.    [한국거래소 제공]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 여의도사무소 모습. [한국거래소 제공]

법원이 한국거래소의 시가총액 미달 상장폐지 규정을 위법·무효로 판단하면서 부실기업 퇴출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상폐 절차를 밟고 있는 기업들의 퇴출이 미뤄질 가능성이 커진 데다 내년 7월 예정된 시총 기준 추가 상향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정부가 추진해 온 코스닥시장 체질 개선 구상도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6일 금융투자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는 2일 코스피 상장사 주연테크와 코스닥 상장사 케이엠제약이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낸 상폐 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각각 인용했다. 정부와 거래소의 상폐 요건 강화에 대한 법원의 첫 판단이다.

법원은 시총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별도의 소명 기회 없이 상폐하도록 한 규정 이 비례의 원칙에 현저히 어긋나 위법·무효라고 판단했다. ▷기업에 이의신청과 소명 기회를 주지 않은 점 ▷시총 회복 요건을 ‘45거래일 연속 유지’로 강화한 점 ▷시총 기준 상향 시점을 6개월 앞당긴 점 등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시총은 최종 부도나 완전자본잠식과 달리 경기 충격이나 투자자금 흐름 등 기업이 통제하기 어려운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이에 시총 미달 기업에는 이의신청이나 기업심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회생 가능성을 소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다.

상장 유지 시총 기준을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강화한 점도 구체적 필요성이 결여된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 기업에 충분한 준비 기간을 주지 않아 비례의 원칙과 예측 가능성을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금융위원회와 거래소는 당초 2027년 코스피 300억원·코스닥 200억원, 2028년 코스피 500억원·코스닥 300억원으로 매년 단계적으로 기준을 높일 계획이었다. 이후 강화 주기를 반기 단위로 앞당기면서 7월부터 코스피 300억원, 코스닥 200억원 기준이 적용됐다.

‘45거래일 연속 유지’ 요건의 타당성도 문제로 지적됐다. 현행 규정상 시총 미달로 관리종목에 지정된 기업은 시총 기준을 90거래일동안 45거래일 연속 유지해야 상폐를 피한다. 기존에는 90거래일 동안 시총 기준을 연속 10거래일, 누적 30거래일 이상 웃돌면 상폐를 면했다. 법원은 거래소가 45거래일이라는 기간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실증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이번에 시총 기준 상폐 규정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같은 사유로 퇴출 위기에 놓인 기업들의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기업들의 법적 대응은 이어지고 있다. 7월 유틸렉스와 대진첨단소재에 이어 9월에는 케이엠제약·골드앤에스·제일엠앤에스·삼영이엔씨·주연테크가 상장폐지 결정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달 1일에는 메디콕스와 핀텔도 가처분 신청에 나섰다.

기업들의 퇴출 절차도 지연될 전망이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시장 침체 상황을 고려해 내년 1월 추가 상향 예정이던 시총 기준의 적용 시점을 내년 7월로 유예했다. 일정 재무 요건을 충족한 기업에는 정리매매 없이 코넥스로 이전 상장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다만 법원의 가처분 인용으로 상폐 효력이 정지된 기업들이 코넥스로 이전하기보다 시장에 남아 법적 판단을 기다리는 사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추진해 온 코스닥시장 체질 개선 방안도 시험대에 올랐다. 스팩과 우선주를 제외하고 2일 기준 시총 200억원 미만 코스닥 상장사는 72곳에 달한다. 주가가 1000원에 못 미치는 이른바 ‘동전주’도 44곳에 이른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시총 기준 상폐에 제동이 걸리면서 동전주 퇴출도 재점검이 필요해졌다”며 “법원이 상폐 규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만큼 보완책 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2일 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앞서 금융위는 2월 부실기업의 신속·엄정한 퇴출을 위한 상폐 제도 개혁 방안을 발표하면서 거래소의 상장폐지 결정에 대한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는 사례는 드물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21~2025년) 상폐 관련 가처분 소송 85건 가운데 인용된 사례는 2건에 불과했다.

거래소는 같은 날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과 코스닥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을 각각 개정, 상폐 등의 절차가 중단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추가했다. 유가증권시장에서는 법원 결정 등에 따라 관리종목 지정을 유예하거나 지정 효력을 정지할 수 있도록 제46조 제3항을 신설했고, 코스닥시장에도 같은 취지로 제58조 제3항과 제59조 제5항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주연테크와 케이엠제약은 본안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 상폐와 정리매매 절차가 중단된다. 문이림 기자


mo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