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정년 28년째 ‘60세’…재고용 제도 채택
희망자 재고용 의무화까지 25년 단계적 확대
노사정 부담 분담…성과 중심 임금체계 개편
[헤럴드경제=권제인 기자] 일본이 법정 정년을 늘리는 대신 재고용 중심의 65세 고령자 고용확보 조치를 택한 배경에는 ‘청년 취업 빙하기’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청년층의 구직 장기화와 ‘쉬었음’ 인구 증가 등 취업난이 심화하는 가운데, 일률적인 법정 정년연장 대신 재고용 제도로 고령자 고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11일 ‘일본의 정년연장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일본은 법 개정 당시 ‘청년 취업 빙하기’로 불릴 정도로 청년고용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기업 부담과 노동시장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정 정년연장 대신 재고용 중심의 65세 고령자 고용확보 조치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연공형 임금에 청년 취업난까지…일률적 연장 땐 부담 전가 우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24년 말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생산가능인구는 2019년 정점을 찍고 감소세로 돌아섰고, 15세 이상 인구도 2032년 이후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행은 향후 10년간 노동공급이 6.4%, 141만명 줄어들고 국내총생산(GDP)은 3.3%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노동시장 구조다. 근속 1년 미만 근로자 대비 근속 30년 이상 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한국이 2.95배로 일본 2.27배, 독일 1.80배, 프랑스 1.63배, 영국 1.52배보다 높았다. 경총은 근속연수에 비례해 임금이 오르는 연공형 임금체계를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키우고 청년 신규채용 여력을 줄이는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청년층의 어려움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청년(15~29세) 실업률은 6.1%로 전체 실업률 2.8%의 두 배를 웃돌았고, 체감실업률은 16.0%로 전체 8.7%의 2배에 육박했다. 20·30대 ‘쉬었음’ 인구는 71만7000명으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연공급 중심 임금체계를 그대로 둔 채 법정 정년만 늘리면 ▷신규채용 등 고용 여력 악화 ▷인건비 등 경영 부담 증가 ▷1·2차 노동시장 간 이중구조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은 “청년층의 ‘쉬었음’ 상태가 장기화할수록 근로를 희망하는 비율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실제 취업률이 낮아진다”며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영구 이탈하거나 일을 하지 않고, 교육이나 직업 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족’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日 법정 정년 28년째 60세…재고용 중심으로 25년 걸쳐 확대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1998년 법정 정년 60세를 시행한 뒤 지금까지 28년간 이를 늘리지 않았다. 대신 2004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해 기업이 재고용, 정년연장, 정년폐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65세까지 고용을 확보하도록 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재고용 중심의 이 조치는 2006년 시행됐다.
보고서가 인용한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대졸 취업률은 1991년 81.3%에서 2003년 55% 수준까지 급락했다. 15~24세 비정규직 비중은 1990년 20.5%에서 2005년 47.7%로 두 배 넘게 뛰었다.
경총은 일본이 고령자 고용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뒀다고 설명했다. ▷세 가지 조치 중 기업의 선택권 보장 ▷노사 협의나 취업규칙을 통한 재고용 대상자 선별기준 마련 허용 ▷적용 연령의 단계적 상향 ▷시행시기 2년 유예 등이다. 적용 연령은 2006년 62세에서 2007년 63세, 2010년 64세, 2013년 65세로 순차적으로 높였다.
의무화도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일본은 2000년 65세 고용확보 조치를 노력 의무로 시작해 2006년 단계적 의무화, 2013년 희망자 전원 재고용 의무화를 거쳤고 경과조치가 끝난 2025년에야 전면 적용했다. 희망자 전원 재고용을 의무화하기까지 2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제도를 넓힌 셈이다. 노동정책심의회에 노동자·사용자·공익위원이 함께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특징이다.
현장 도입도 활발하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직원 21명 이상 기업의 99.9%가 65세까지 고령자 고용확보 조치를 실시하고 있으며, 67.4%가 재고용을 도입했다. 직원 301명 이상 기업에서는 재고용 도입 비율이 79.4%에 달했다.
노사정이 부담 나누고 임금체계 개편…기업은 직무·성과로 연착륙
일본은 고령자 고용연장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노사정이 나눠 짊어졌다. 근로자는 재고용되면서 피크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아들였다. 2010년 조사에서 재고용 근로자의 임금은 정년 직전의 평균 68.4%였다. 기업은 희망자 전원을 단계적으로 65세까지 고용하되 임금체계 개편과 생애경력개발을 시행했다.
정부는 고용보험에서 재고용 근로자의 임금 삭감분 일부를 지원하는 ‘고연령고용계속급부’ 제도를 운영했다. 임금이 60세 퇴직 전의 75% 미만으로 떨어지면 65세까지 매달 임금의 10%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원 비율은 2025년부터 10%다. 2007년에는 합리적인 취업규칙 변경은 노사 합의 없이도 가능하도록 노동계약법에 명시해 임금체계 개편의 걸림돌도 줄였다.
아울러 기업들은 직무·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바꿨다. 한 기업은 2013년 고용확보 조치 의무화에 맞춰 현역 근로자의 기본 임금 곡선을 낮추는 대신 인사평가에 따른 인상폭 격차를 키웠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은 고령 근로자의 임금 향상에 썼고, 고령자 고용 확대로 인한 추가 재원은 들이지 않았다. 2023년에는 핵심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인력이 60세 이후에도 역량을 발휘하도록 ‘시니어 마이스터’ 제도를 신설했다.
이상철 경총 고용·사회정책본부장은 “우리 노동시장의 높은 임금 연공성과 고용 경직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한 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정년만 일률적으로 연장할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청년 고용 위축과 노동시장 이중구조 심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률적인 법정 정년연장 논의에서 벗어나, 일본의 정책 경험처럼 청년 고용과의 충돌을 방지하고 기업의 자율적 선택권을 보장하는 재고용 중심의 유연한 제도 설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y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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