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까지 ‘더블빌:시나위’ 중 배진호 안무 ‘아라’
군더더기도 버릇도 없는 몸, 액션 영화 같은 듀엣
예원학교서 만나 20여년…“눈만 봐도 아는 사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천근의 무게를 짊어진 발걸음이 이어진다. 100번을 넘어온 아리랑 고개, 이번엔 101번째다. 무대를 짓이기는 걸음들이 지나가면, 심장을 옥죄는 전자음악의 박동과 함께 공기가 뒤바뀐다. 상반신을 15도쯤 비스듬히 기울이고 캣워크를 하듯 걷는 무리. 전장의 예고인가, 균열의 전조인가. 대형 무대의 아득한 끝과 끝에서 서로를 서늘하게 응시하며 걸음을 내딛는 두 사람이 있다.
숨 막히는 대치다. 서서히 차오르는 BPM(분당 비트 수)이 객석의 심장을 조여 올 때 두 사람은 거리를 좁혀간다. 암사자의 걸음으로 느리고 묵직하게, 날카롭고 기민하게. 경계하면서도 ‘공격의 발톱’은 숨긴 채 서로에게 다다른다. 짐승의 손으로 부둥켜안은 채 몸이 엉키고, 위협하듯 포효의 표정을 내지른다. 밀고 밀리는 전진과 후퇴, 공격과 방어의 찰나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합으로 직조된다. 같은 호흡, 같은 시선, 군더더기 없는 몸짓. 둘은 서로의 몸이 되고 감정이 된다. 잘 짜인 액션 영화의 격투 시퀀스처럼 몸짓이 숨 가쁘게 휘몰아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둘의 손발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무용단에서 12년을 함께하는 동안 서로를 너무도 가까이에서 지켜봤어요. 싸우고 있는 장면에서도, 사실 서로를 무척이나 의지하고 있어요.” (박혜지·이요음)
국립무용단 신작 ‘더블빌: 시나위’(1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중 배진호(32) 안무의 ‘아라(AHRA)’다. 국립무용단 무대에서 좀처럼 본 적 없는 파격으로 채워진 작품이다. 그 팽팽한 긴장의 한가운데에 단체의 간판 무용수인 박혜지(38)·이요음(37)이 섰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박혜지는 “이 작품 전체가 하나의 인생을 얘기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액션 영화 같은 듀엣…군더더기 없는 몸
K-팝 걸그룹 에스파에 ‘지민정’(카리나·윈터)이, 아이브에 ‘안녕즈’(안유진·장원영)가 있다면 국립무용단엔 이 둘이 있다. 완벽한 비주얼과 빈틈없는 합. 박혜지와 이요음은 국립무용단의 지민정이자 안녕즈다.
‘칼군무’가 스치지만 이내 지워진다. 신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전신 타이즈 의상은 군더더기 없는 명징한 동작을 남긴다. 일생 한국 춤을 춰온 두 사람이 이질감 없이 빚어낸 현대적 움직임,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본능적인 맹수의 몸짓, 발산과 분출 사이로 겹겹이 쌓인 한국 춤의 발디딤과 단정한 선. 춤과 연기가 밀물처럼 들이치고, 무대를 타고 건너오는 감정이 관객에게 전이된다. 고통스러운 그 모든 순간의 감정들이다.
작품은 베테랑 단원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난관은 안무의 난도가 아니라 의상이었다. 몸이 “적나라하게 내비쳐지는” 올 타이즈다. 박혜지는 “그간 작품들은 치마나 통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몸이 드러나니 굉장히 어색했다”며 웃었다. 그의 설명으로는 한국 춤이 서양 춤과 갈리는 지점이 하체에 있다. 그는 “타이즈를 입으니 다리를 내놓을 때의 움직임, 발과 다리, 골반의 사용이 달라졌다”며 “몸이 딱 쪼인 상태에서 춤을 추니 움직임에 긴장이 들어가고 포지션과 라인에 더 신경 쓰게 됐다. 우리에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몸에는 군동작이 없다. 무용수마다 몸에 배기 마련인 버릇이나 장식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 그것들을 털어낸 자리에 동작의 윤곽만 또렷이 남는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지켜 온 것이다.
“습관이나 버릇 없이 깔끔하게 춰야 한다는 생각이 좀 확고한 편이에요. 다양한 안무자의 안무를 습득할 때 방해 요소가 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요. 저희는 쿠세(癖·버릇을 뜻하는 일본어)라고 하는데, 그것만은 피하자는 생각이 소신처럼 박혀 있어요.” (박혜지)
박혜지의 이야기를 듣던 이요음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춤은 닮았다. 정교하고 깔끔하다. 이요음은 “(박혜지) 언니의 춤은 박자와 몸짓이 정말 정확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며 “감정을 굳이 내지 않아도 동작과 몸짓의 느낌만으로 감정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박혜지에겐 이요음의 춤이 그렇다.
101번째 고개의 역설…싸우는 춤을 버티게 하는 눈빛
“쟤네 며칠 가나 보자.” “6개월 정도 되면 서로 떨어져 있을 거야.”
노상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을 두고 무용단 선배들 사이에선 이런 말도 나왔다. 워낙 경쟁이 치열한 곳이기에, 누군가 주역이 되면 누군가는 조역으로 머물러야 하기에 혹독한 현실이 관계도 흔들 것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이었다.
2014년 입단한 두 사람은 무용단의 대표 ‘단짝’이다. 둘의 인연은 길다. 예원학교 시절 2년 선후배로 처음 만나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까지 함께 다닌 무용 엘리트들이다. “같은 선생님께 배웠고”(박혜지), “무용단에서 12년간 함께하며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낸 사이”(이요음)다.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둘이 듀엣으로 한 무대에 서는 건 꽤 오랜만이다. 무용단에선 ‘맨 메이드’(2018) 이후 8년 만이다. 2~3분가량 이어지는 서슬 퍼런 대립은 이들이기에 가능하다. 무리를 이끄는 어머니이자 리더인 박혜지와 그 무리 안에서 그를 따르면서도 맞서는 이요음의 싸움은 서로를 보듬으면서도 겨누는 인간사의 한 장면이다. 정작 그 싸움을 버티게 하는 것은 싸우는 상대다. 듀엣은 무용수들이 앞에서부터 내달린 뒤, 체력적으로 가장 버거운 지점에 놓여 있다.
“그냥 눈빛인 것 같아요. 서로 느끼는 아이컨택에서 오는 힘이 있거든요. 그거 할 때 서로 힘을 받기도 하고요.” (박혜지)
연습의 날들은 치열했다. 장면마다 맞춰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요음은 “(안무가가) 엄청 섬세하고 디테일해서 원, 투가 아니라 ‘원 앤드(one and)’까지 다 맞추는 연습을 계속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은 연습량의 결과라고 확신한다.
물론 ‘연습의 양’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둘이 함께해 온 시간의 길이가 연습의 결과를 빛냈다. “서로의 춤을 너무도 잘 알기에”(박혜지) ‘척하면 척’이다. “가족과도 같아 어떤 의견도 편하게 나눌 수 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이요음) 사이라는 점이 둘의 춤을 달리 보이게 만든다.
요즘엔 호흡을 맞출 때마다 둘 사이에 감정이 흐른다. 이요음은 “연습할 때 가끔 울컥한다”고 털어놨다.
호수 위 백조와 뿌리 깊은 나무…서로의 버팀목
국립무용단의 ‘지민정’이자 ‘안녕즈’는 애써 친해지려 한 사이도, 서로에게 다가서려 노력한 사이도 아니다. “대화로 가깝다기보다 그냥 몸이 가까이”(이요음) 있었고, “그냥 물들듯이”(박혜지) 가까워졌다.
무대 이력도 나란하다. 2011년 국립무용단 인턴 단원으로 시작한 박혜지는 2014년 인턴 신분으로 ‘회오리’ 초연의 주역에 발탁됐다. 2017년 무용극 ‘리진’에서는 이요음이 리진을, 박혜지가 도화를 맡았다. 우정과 시기 사이를 오가는 두 궁중무희였다. 그로부터 9년, 두 사람은 늘 서로의 곁에 있었다. 박혜지는 “성격이 안 맞았다면 같이 못 다녔을 수도 있다”며 성향도, 식성도 닮았다고 웃었다.
닮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대 안팎에서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를 만드는 한 끗은 결과 온도다. 그 차이가 같은 동작에 다른 감정과 표현력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빛깔로 서로를 채우고, 무대를 빛내는 이유다.
박혜지가 보는 이요음은 “평온한 호수 속에 떠 있는 백조 한 마리”다. 그는 “어릴 때 요음이를 보며 부러웠던 것이 감수성이었다”며 “제가 감정을 욱여넣듯 만들어 낼 때 요음이는 같은 걸 해도 이미 완전히 몰입한 단계에 와 있었다”고 돌아봤다. 학년으로는 2년, 나이로는 겨우 한 살 차이지만 이요음에게 박혜지는 큰 나무다. 그는 “겉은 여리여리한데 안엔 깊은 뿌리가 팍 박혀 있는 느낌”이라며 “춤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남자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전 감정이 먼저 이입돼 동작을 놓칠 때가 있는데, 언니를 보며 더 정확하게 할 줄 아는 무용수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다. 오래도록 서로를 지켜본 두 사람은 서로의 춤을 거울삼아 같은 자리에 가 닿았다.
“동경이 없고 서로가 더 나아가야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단체 생활은 지루한 작업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함께 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느낌이 드니까 늘 재밌는 것 같아요.” (이요음)
늘 함께이던 두 사람은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냈다. 주역으로 내달리던 두 사람은 가정을 꾸리며 인생의 또 한 고개를 넘었다. 박혜지는 “아기 낳고 나서부턴 희한하게 찢어져서 작업을 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고비도 저마다 찾아왔다.
“입단 후 너무 좋아 해방감이 왔어요. 이젠 더 이상 경쟁을 안 해도 되겠구나, 오디션을 안 봐도 되겠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매너리즘이 오더라고요. 쳇바퀴 굴러가듯 항상 루틴이 같다 보니 그 안에서 또 막히는 게 있는 거예요.” (박혜지)
그때가 7년 차쯤이었다. 코로나19가 찾아왔고, 임신하며 자연스럽게 잠시 무대를 떠났다. 출산 후엔 지독한 육아우울증이 오며 넘어야 할 고개가 더 늘었다. 이요음 역시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힘든 일은 늘 그렇듯 한꺼번에 찾아왔다. 가족에게 큰일이 이어질 때 곁을 지킨 것은 박혜지였다.
“언니가 매일매일 기도 문자를 보내줬어요. 정말 많은 의지가 됐어요. 꽤 긴 시간이었고, 제 안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어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잘 헤쳐갈 수 있을지 길을 찾지 못할 때 언니가 나무처럼 있어 줘서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어요.” (이요음)
이요음이 한동안 무대를 비운 사이, 박혜지에겐 깊은 쓸쓸함이 찾아왔다. 그는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외로운 마음도 커졌다”며 “요음이가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다, 그저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라고 회고했다.
20대의 꿈 많던 신입 단원 시절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요음은 “관객 중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던 때였다”고 했다. 지금은 다른 곳을 보고, 다른 것을 꿈꾼다. 그는 “이 공간 안에서 더 즐기는 무용수이고 싶다”고 했다. 단, 조건이 붙는다. “더 완벽해야지 즐길 수가 있더라고요.”
박혜지는 “마음껏 춤출 수 있는 곳에 가서 춤을 추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무용단에 들어왔다. 지금 그가 그리는 것은 도화지 같은 몸이다.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어야 다른 색깔들이 왔을 때 잘 그려지는 것처럼 내 몸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이가 들며 굳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가 들 때도 있지만, 그가 붙드는 다짐은 하나다. “고집하지 않고 안무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자, 그렇게 새기고 있어요.” 오늘도 두 사람은 ‘101번째 고개’를 넘는다. 서로를 꽉 붙들고, 서로를 응시한 채. 그 눈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애틋함이 담겼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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