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부활한 롯데칠성음료 ‘캪틴큐’
“매일 찾는데도 매진” 이례적 품귀 현상
2000년대 Y2K 패션 아이템도 수요 급증
‘90년대 책가방’ 잔스포츠의 화려한 부활
“불확실한 현실에서 정서적 안정감 구해”
[헤럴드경제=김진·박연수 기자] AI(인공지능) 시대를 사는 소비자들이 철 지난 유행에 지갑을 열고 있다. 20년 전 인기였던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블루투스 대신 줄이 늘어진 유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1940년대 개발된 LP(Long Play Record)를 즐기기 위해 거액의 턴테이블을 사는 이들도 있다. 단종됐던 먹거리를 손에 넣기 위해 편의점을 오가는 현상까지 벌어진다. 과거의 물건이나 상품이 새롭게 주목받는 ‘레트로 열풍’의 귀환이다.
레트로는 낯선 주제가 아니다. 2010년대 초반에도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영화 ‘건축학개론’이 흥행하며 ‘복고’ 키워드가 주목받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전후로는 추억의 소주 ‘진로이즈백’과 ‘곰표 밀맥주’가 등장하고, ‘포켓몬빵’이 부활했다. 저화질 필름카메라가 재조명된 시기도 있었다.
최근 레트로 열풍의 배경에는 위축된 소비심리가 있다. 실제 한국은행이 발표한 10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월보다 1.2포인트 내린 105.4를 기록했다. 올해 중동 전쟁 발발 직후인 4월 99.2까지 떨어진 뒤 반등했던 지수가 8월에 이어 또다시 꺾였다. 소비자심리지수는 100을 웃돌면 낙관적, 밑돌면 비관적 전망을 뜻한다. 중동 전쟁 등 글로벌 정세 불안과 국내 증시 조정 속에 소비심리가 위축된 가운데 과거를 추억하는 레트로 열풍이 번졌다는 해석이다.
술 줄여도 유행은 산다…캪틴큐의 역주행
대표적인 사례는 롯데칠성음료가 최근 재출시한 ‘캪틴큐’다. 1980년 1월 처음 나온 캪틴큐는 양주가 대중화되기 전인 1980~90년대를 휩쓴 제품이다. 1991년 주세법 개정으로 제조법이 바뀐 뒤에는 럼 원액 대신 주정과 당시럽, 럼향, 캐러멜 색소 등을 사용한 유사 양주였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대학생과 서민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마시면 이틀 뒤 깬다”는 악명은 2015년 생산 중단 이후 온라인에서 ‘밈’으로 퍼지며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재출시된 캪틴큐는 파나마산 럼 원액 99%를 사용한다. 10월 중순 선보인 ‘캪틴큐 보물상자’ 기획 상품은 공장 출고 기준 하루 만에 1만2000세트가 모두 팔렸다. GS25와 CU에 각 1만여개씩 공급된 단품 초도물량도 금세 동났다. 롯데칠성음료는 최근 3만세트 한정 기획 상품 ‘고장 난 캪틴큐 타임머신’도 내놨다.
GS25에 따르면 출시 직후인 10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 ‘우리동네GS’ 앱 내 통합검색 일일 순위에서 캪틴큐는 꾸준히 3위 안에 들었다. 이 기간 누적 검색량은 100만건이다. 중고 거래 커뮤니티에는 ‘캪틴큐 보물상자’를 정가의 10배 가깝게 파는 글도 올라와 있다.
인천 계양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37) 씨는 “편의점 사전예약 기간에 맞춰 집 앞 편의점에 가니 이미 동이 난 후였다”며 “이후 매일 편의점 앱에 들어가서 캪틴큐를 검색하는데 매번 매진”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와 같은 3040세대에게 캪틴큐는 커뮤니티 밈으로 잘 알려져 있다”며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의 대상이라 꼭 한번 마셔보고 싶다”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1년 동안 숙성된 파나마산 럼 원액을 사용하는 만큼 숙성뿐 아니라 수입에도 시간이 걸린다”며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해결책을 모색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이러한 품귀 현상은 최근 주류 소비 감소에 직면한 주류업계에서 이례적인 흥행으로 여겨진다.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소속 안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분 주세는 2020년 이후 최저인 2조4352억원이다. 2024년(2조5495억원)보다 1143억원(4.5%) 줄어든 규모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주류 소비 감소에는 과음을 피하는 2030세대 문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CU에 따르면 캪틴큐 구매자 중 2030 비율이 56.3%였다. 30대가 37.9%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40대(26.5%), 20대(18.4%), 50대 이상(17.2%)이 뒤를 이었다. 술은 줄여도 트렌드는 챙기겠다는 심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식품업계에서도 과거 인기 제품이 속속 재출시되고 있다. 농심은 2017년 출시해 2024년 단종한 ‘볶음너구리’를 10월 다시 내놨다. 농심은 단종 이후 오히려 소비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출시 요청이 꾸준히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10월 중순 진행한 3000명 한정 사전 예약은 2시간 만에 마감됐다. 20대 직장인 박모 씨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볶음너구리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마음에 편의점을 3곳이나 돌았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크라운제과도 1989년 출시해 2024년 단종한 ‘미니쉘’을 11월 중 다시 선보일 예정이다.
커피프린스 ㄱ하니? ‘Y2K 패션’도 돌아왔다
패션업계에는 올해 본격적인 Y2K(Year 2000) 바람이 불고 있다. 배꼽 아래로 허리선을 내린 로우라이즈 청바지, 뱅글 액세서리 등 2000년대 초반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등 유명 스타들의 패션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화려한 로고나 장식을 배제하고 절제한 ‘올드머니’ 트렌드에서 개성을 과감히 드러내는 트렌드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대 드라마 출연자의 극중 스타일도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2007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배우 채정안이 연기한 ‘한유주’의 스타일이 대표적이다. 무릎 길이 미디스커트와 카프리팬츠, 홀터넥 등 약 20년 전 유행한 아이템이 ‘한유주 코어’로 재조명받고 있다. 과거 ‘엄마 패션’으로 여겨졌던 퍼재킷과 악어가죽 가방도 인기다.
Y2K 패션의 인기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2030세대 이용률이 높은 카카오스타일의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에 따르면 올해 1~10월 카프리 팬츠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348% 늘었다. 거래액은 864% 증가했다. 같은 기간 로우라이즈 상품 검색량과 거래액은 각각 57%, 219% 늘었다. 젤리슈즈와 뱅글 아이템의 거래액도 각각 142%, 192% 증가했다.
추억의 패션 브랜드도 부활했다. 1990년대 국내 대학가에서 인기를 끈 ‘잔스포츠(JanSport)’와 ‘이스트팩(EASTPAK)’이다. 각각 1967년, 1952년 론칭한 두 브랜드는 최근 1020세대 중심으로 수요가 다시 늘면서 패션 플랫폼 무신사와 손잡았다.
잔스포츠의 2024년 국내 매출은 전년 대비 64% 증가했다. 2025년 오프라인 매출은 2배가량 늘었다. 올해 7월에는 서울 성수동에 전 세계 첫 플래그십 매장을 열었다. 8월 무신사가 잔스포츠 본사와 16개국 유통 파트너를 초청해 연 ‘잔스포츠 아시아·유럽·중동 FW27 세일즈 서밋’에서는 한국 시장 성과가 공유됐다. 론칭 59년 만의 첫 의류 컬렉션도 무신사를 통해 나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3040세대에게 Y2K 트렌드는 과거의 향수지만, 1020세대에게는 새로움으로 느껴진다”며 “올해 ‘키키’, ‘A2O’ 등 2000년대 초반을 연상시키는 콘셉트의 아이돌이 연이어 인기를 끈 점도 Y2K 트렌드 확산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밖에 젊은층에서는 LP 음반과 턴테이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가 10월 30일 온라인 한정 수량으로 선보인 프리츠한센과 테크닉스의 한정판 조명·턴테이블 세트는 249만9000원의 가격에도 판매 시작 3초 만에 품절됐다. 프리츠한센은 덴마크 가구 브랜드, 테크닉스는 일본 오디오 브랜드다. 고(故) 김광석·유재하 등 1980~90년대 가수들의 LP는 20만~40만원선에 거래된다.
추억 소환 이유는 상실감…“안정 원하는 심리”
레트로 열풍의 원인으로는 경제·사회적 상황이 꼽힌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입소스는 9월 공개한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에서 레트로 열풍을 설명하며 ‘로스탤지어(lostalgia)’라는 합성어를 언급했다. 보고서는 “자신이 누릴 것이라 기대했던 미래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상실감을 의미한다”며 “소비자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과거에 가졌던 기대와 현재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코스피 시장이 무너지는 등 경제적 불안이 심화하면서 어린 시절 추억의 상징으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 역시 “단순한 유행의 반복이 아닌,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익숙함과 정서적 안정감을 찾으려는 소비심리”라고 말했다.
이러한 소비심리가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전략과 맞물리며 상승효과를 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홍주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 레트로 상품은 기존 브랜드의 인지도와 소비자의 추억을 활용해 신제품 출시의 위험과 마케팅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라며 “한정판 마케팅이나 소셜미디어(SNS)와 결합하면 희소성·화제성을 높여 구매를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홍주 교수는 “추억만으로 지속적인 소비를 끌어내기는 어렵다”며 “현재 소비자가 원하는 품질과 실용성을 더해야 장기적인 성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은희 교수는 “트렌드는 정반합(正反合)의 흐름을 타는 만큼 유행의 끝이 정해져 있다”며 “소비자들이 싫증을 낼 때쯤 또 다른 트렌드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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