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해결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개념 설계·규칙 만드는 출제자 되라
로드맵 밖 질문이 혁신 이끌어
기술주권이 경제안보…인내자본은 필수
인텔이 전에 없던 중앙처리장치라는 CPU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제품에 적용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여러가지 칩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생각은 이론적으론 가능해도 당시 아무도 실제 만들어보려 하지 않았다. 인텔은 2년의 시행착오 끝에 1971년 시제품을 겨우 완성했고, 11월에 최초의 범용 CPU인 인텔 4004를 출시했다. 그러나 사겠다는 기업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1972년에 8008, 1974년에 8080, 1978년에 8088을 내놓으며 지속적으로 성능을 개선했다. 마침내 1981년 IBM이 첫 개인용 컴퓨터인 5150 모델에 채택하면서 인텔 제국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흔히 인텔의 성공, CPU의 탄생 스토리는 이렇게 진행되지만 기술혁신연구가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다른 곳을 주목한다. 일본의 전자계산기 생산업체인 비지컴의 코지마 대표가 인텔의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에게 던진 “저장, 논리연산, 제어를 같이 수행할 수 있는 칩을 만들 수 있냐”는 최초의 질문이다. 코지마의 질문이 없었으면 인텔 CPU의 탄생은 없거나 달라졌을 것이란 얘기다.
고도의 기술적 확보에는 도전적 시행착오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축적의 시간’으로 유명한 이 교수가 이번엔 기술선진국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탐색한 ‘최초의 질문’(민음사)을 펴냈다.
저자는 한국 산업계는 그동안 기술선진국들이 제시한 로드맵을 따라 더 빨리 나은 수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 왔다며, “어느 덧 앞사람의 발자국이 안보이는 눈밭에 와 있다”고 지적한다. 벤치마크가 없는 화이트 스페이스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발자국을 따르는 방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개발도상국 시절엔 문제를 푸는 입장이었다면, 이젠 기술선진국처럼 개념을 설계하고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출제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도 하지 않은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한 걸음 디뎌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방향을 수정하면서 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최초의 도전적 질문이다. 저자는 아무리 축적에 나설 각오와 준비가 돼 있어도 최초의 도전적 질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며, 혁신은 바로 도전적 질문을 채택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도전적 질문은 전에 없던 것을 제기하기 때문에 해법을 찾는 데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다. 당연히 처음으로 제시되는 해법은 대체로 보잘 것 없는 경우가 많다. 끊임없이 스케일업 과정이 요구된다.
한 예로 자율주행차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이런 최초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2002년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모하비 사막의 240킬로미터 구간에서 자율 주행 차량이 달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2004년 3월 13일 많은 도전자들이 참가했지만 100만 달러를 가져간 팀은 없었다.
최초의 질문이란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이다. 설명되지 않던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논리의 빈 부분을 채우려고 하거나 서로 다른 이론의 충돌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등이 해당된다. 사업면에선 업계에서 통용되는 로드맵을 벗어나는 목표를 제시하거나 시장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질문은 어떻게 기술의 진화를 이끄는 걸까?
그 시작은 기존 기술의 조합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조합이 기술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새로운 문제를 풀어 보려면 기존 기술을 조합해야 한다. 인류의 기술 발전은 그렇게 진행돼 왔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술은 없으며 오늘까지 존재하는 기술의 조합으로 내일의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영화를 아마존에서 물건 사듯 온라인에서 주문하고, 내 집 탁자 위로 가져올 수 없을까?”란 질문을 던졌고, 다이슨은 “먼지 봉투 없는 청소기를 만들 수 없을까?”란 물음을 제기했다. 또 일론 머스크는 “1단 로켓을 다시 쓰면 어떨까?”란 질문을 던졌다. 책에는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기술 개발과 혁신을 거듭, 시장의 선두주자가 된 다양한 기업의 사례가 들어있다.
판을 바꾸는 혁신적인 개념 설계와 기술 개발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인내 자본이 확보되지 않으면 개발의 결실을 볼 수 없다. 저자는 민간 금융 시장에만 기댈 경우 필요한 수준보다 늘 모자라기 때문에 국가가 공적 재원을 직접 투입, 인내 자본이 충분히 공급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GPS와 인터넷, 인공지능 비서 시리, 터치 스크린 같은 애플과 아마존의 핵심 기술은 40년 이상 미국 정부가 인내 자본을 투자해서 싹 틔운 것이다.
혁신 기술에 각국이 매달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21세기 국가의 존립은 ‘기술 주권’에 있기 때문이다. “기술 주권이란 국가 경제와 국민 복지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주권적 의지에 따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가리킨다. 이는 핵심 전략 기술과 제조 역량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략 기술이 있어야 기술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반자로 대접 받으면서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기술 주권은 경제 안보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책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이 직면한 경제와 기술의 근본적 문제에 착목, 현재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최초의 질문/이정동 지음/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