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보호·보존으로서 환경개념 형성
생태보존 조건으로 개발 지원 ‘리우 선언’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 점 한계로 지적
후원금 놓고 단체간 경쟁·충돌 딜레마
각문화 특수성·지역의 삶 소중히 여겨야
지속 가능한 발전, 탄소배출권, ESG는 이제 일상의 표준 같은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결과다. 그런데 환경 문제는 어떻게 우리 시대의 글로벌 화두가 된 걸까?
환경 이슈는 갈래도 다양하고 관련 단체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환경을 보는 관점과 지향점도 제각각이며, 나라마다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하고 뿌리깊은 환경의 역사를 세계적인 환경 역사학자 요아힘 라트카우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생태의 시대’(열린책들)는 19세기 낭만주의로부터 환경을 둘러싼 수많은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산하면서 대하를 형성한 과정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라트카우에 따르면 오늘날의 보호와 보존으로서의 환경 개념이 형성된 것은 1970년 전후다. 이전의 자연 인식은 낭만적 자연 사랑이나 자연으로의 회귀, 혹은 자연재해에 따른 환경 보호의 필요성 등 좁은 의미로 사용돼 왔다. 그러던 게 1970년 전후 우리가 ‘생태 혁명’으로 부르는 질적·양적 변화가 이뤄지면서 소위 ‘생태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 전주곡은 1970년 4월22일 ‘지구의 날’ 행사였다.
저자는 이 시기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들이 노출, 폭발적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환경이라는 주제가 국제 사회의 주요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으로 본다. 베트남 전쟁 중의 고엽제 살포, ‘인구 폭탄’으로 인한 불안, 자동차와 공장의 증가에 따른 매연과 공해, 핵에너지, 산성비, 위생과 건강에 대한 관심 등이 새로운 주제로 부상하면서 관련 시민 단체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여기에 1960년대 후반 우주선이 찍은 ‘푸른 별’ 지구 사진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자는 열망을 끌어올려, 보호할 대상으로서의 지구 환경 개념이 만들어지게 된다.
저자는 환경 운동의 역사는 한 흐름으로 엮이지 않고 다양한 흐름들이 새롭게 엮이면서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차별화된다고 지적한다.
어떤 경우엔 같은 사안이 지역에 따라 찬반이 갈리기도 한다.
가령 7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자연 보호 운동가들은 수력 발전에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반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같은 알프스 국가의 자연 보호 운동가들은 댐으로 계곡을 막아 망쳐 놓느니 차라리 원자력 발전소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저자는 환경 운동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들과 그 의미를 살피는데, 한 예로 1979년 3월31일 독일의 원자력 발전소 반대 시위에 10만 여명의 운동가들이 하노버에 결집한 일을 조명한다. 독일의 원자력에 대한 강고한 반대는 저항이 지지부진했던 프랑스와 종종 대비되는데, 저자는 이를 인구밀도에 따른 안전 민감도 차이로 해석한다. 흥미로운 점은 60년대만 해도 진보·좌파쪽이 오히려 정부가 과학을 도외시하고 원자력 에너지의 미래를 추구하려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하노버 시위는 가시적 위험이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가설적 위험을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자연 보호 전통과 맥을 달리하는 새로운 환경 운동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또한 정치가 선도적 역할을 한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는 개발도상국의 개발, 성장과 자연 보존이 상충하는 오래된 문제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한 예로, 아마존은 이산화탄소를 먹어 치우고 산소를 공급하는 지구의 허파로 불리지만 최근 개발로 삼림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브라질 현 정권은 국제 여론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마존은 브라질의 것이라며, 환경보호구역 해제, 고속도로 건설, 광산 및 경작지 확대 등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1992년 지속가능한 개발을 내세우며, 이상적 해결책으로 제시된, 즉 생태 보존을 조건으로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프로젝트, 리우 선언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1992년 리우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 점을 한계로 지적한다.
라트카우는 환경 운동의 힘은 요란한 정상 회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 운동이 키워내는 것이라며 환경 운동이 생활 현장으로 내려와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각 문화의 특수성을 살리고 지역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야 말로 글로벌한 환경운동, 지속가능한 환경운동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하고 자원을 아껴야 한다는 세대 정의에 대한 저자의 환경적 해법도 귀기울일 만하다. 즉 속도 제한이나 대중교통 체계의 확장, 가까운 거리 안에서 이뤄지는 편리한 도시 생활 등은 증가하는 노년층과 미래세대인 아동에 다같이 유익하다.
체르노빌 원자로 사고와 소련 붕괴의 관련성, 다양한 활동가들과 단체들의 이야기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린피스, 시 셰퍼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환경 보호 단체들이 언론의 주목도 높은 이벤트 중심의 행사를 벌이고 기부금 경쟁을 하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생태 시대’가 반세기 동안 이어졌지만 사실 환경 문제는 딜레마의 연속이다. 중앙집권화와 전문화가 풀뿌리 단체와 부딪히고 다른 환경 단체와 후원금을 놓고 경쟁하며 국가재정이나 스폰서에 매달려야 하는 딜레마, 그리고 환경 운동이 흔히 그렇듯 목적과 지향점의 혼란 등이 있다.
책은 라트카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 운동 내부의 모습과 객관적인 시각을 아울러냄으로써 환경 딜레마에 빠진 이들에게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생태의 시대/요아힘 라트카우 지음, 김희상 옮김/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