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부엌

술에 절어 해장국을 시켜만 먹다가 어느 날 집에서 소고기뭇국을 직접 끓여봤습니다. 그 맛에 반해 요리에 눈을 떴습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지만 나를 위해 한 끼 제대로 차려먹으면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 끼에 만원이 훌쩍 넘는 식비에 이왕이면 집밥을 해먹어야겠다 결심이 섰습니다. 퇴근 후 ‘집밥러’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요리와 재료에 담긴 인문학 이야기도 한술 떠 드립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오트밀 [게티이미지 뱅크]

[헤럴드경제=신주희 기자] 요새 집에서 요리 좀 하는 MZ세대들은 쌀 대신 이 식재료를 먼저 사다 놓는다고 하죠. 물에 불리고 밥솥에 앉힐 필요도 없습니다. 물만 넣으면 뚝딱 완성되는 오트밀입니다.

칼로리도 낮은데다가 전자레인지로 해먹는 다이어트죽 레시피로 유튜브 알고리즘을 탄 게 시작이었습니다. 배우 진서연 씨도 KBS ‘신상 출시 편스토랑’에 출연해 오트밀로 만든 버섯 크림 리소토를 소개해 화제가 되었죠.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기 전 10일 동안 5㎏ 감량을 위해 대용량 오트밀을 쟁여두고 먹는다고 했습니다.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데다 양식, 한식 등 식사뿐 아니라 티라미수, 쿠키 등 디저트도 만들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 식재료입니다.

지금이야 귀리(오트)가 곡물 중 유일하게 세계 10대 슈퍼푸드에 이름을 올리고 셀럽들의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예전의 오트밀 위상은 지금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중세에는 ‘가축 사료’나 ‘농노나 먹는 음식’ 취급을 받았고 산업혁명 시기에는 빈민층의 애환을 상징하는 음식이었죠. 이번주 ‘퇴근 후 부엌’에서는 어쩌다가 오트밀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더불어 오트밀을 활용한 라구 리소토도 소개합니다.

[재료썰]

“오트는 곡식 질병의 한 종류다”

이 무슨 궤변인가 싶겠지만 고대 로마 시대 백과사전에 등장한 귀리에 대한 설명입니다. 귀리가 엄연한 곡식의 한 종류가 아닌 ‘병 걸린 밀’쯤으로 취급된 것이죠. 로마 제국 시대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저서 ‘자연사(history of nature)’에서 보리와 밀의 씨앗이 퇴화하면 귀리로 자라난다며 이 같이 기술했습니다. 귀리가 밀·보리보다 얼마나 맛이 형편없었으면 고대 로마 사람들이 ‘기형종’으로 분류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사실 귀리는 기형 밀이 아니라 먼 친척에 가깝기 때문에 플리니우스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죠. 어찌되었든 귀리는 곡식 질병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나라에서는 잘 먹지 않는 식재료였습니다.

빵을 먹는 문화권에서 귀리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습니다. 귀리에는 밀가루와 달리 글루텐이 없습니다. 이 글루텐은 빵 반죽을 쫄깃하게 하고 부풀어 오르게 하는데, 글루텐이 없는 귀리로는 빵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척박한 땅. 농가가 버려져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반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던 유럽의 북쪽, 척박한 땅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햇볕이 잘 들지 않고 추운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밀 농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귀리가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줄 유일한 곡식이었습니다. 빵으로 만들기는 어려워 물이나 우유에 귀리를 탄 죽 형태의 ‘포리지(porridge)’ 또는 ‘그루엘(gruel)’로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세 유럽, 귀리에는 우리나라 보릿고개 시절 보리처럼 눈물 젖은 사연이 있습니다. 밀 수확량 대부분을 영주에게 바치고 다음 농사를 위한 종자를 거두면, 남은 농노들은 밀만으로는 겨울을 날 수 없었죠. 이에 농노들은 귀리에 우유 등을 섞어 죽을 쑤어 먹어 버텼다고 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귀리는 질긴 껍질에 섬유질이 풍부해 맛도 없었을뿐더러 소화시키기도 어려웠습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영국 시인 사무엘 존슨 [123rf]

플리니우스의 궤변 이후 1500년이 지나고도 ‘귀리 혐오’는 이어졌습니다. 1755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영어사전을 만든 영국 시인 사무엘 존슨은 사전에 귀리의 정의를 이렇게 썼습니다.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의 먹이로 주는 곡물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곡물.’ 이에 많은 스코틀랜드인이 발끈했습니다. 존슨의 전기 작가였던 보스웰 역시 이에 대해 "그래서, 영국에서는 훌륭한 말이 많이 나오고 스코틀랜드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나 보죠"라고 맞받아쳤다고 하죠.

사실 밀가루, 쌀과 달리 귀리는 역사적으로도 저평가된 곡식입니다. 산업 혁명 이전 귀리는 곧 ‘농업 사회의 석유’였죠. 십자군 전쟁 무렵 유럽 중부에서 처음으로 윤작(돌려짓기)이 도입되면서 귀리는 윤작 작물로 쓰였습니다. 이에 말의 사료였던 귀리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말의 활용도도 높아졌습니다. 이전보다 농민들은 소를 타고 다녔을 때보다 멀리 다녀올 수 있게 되면서 활동 영역이 확장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중세 유럽의 농촌 지형도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은 ‘트랙터’고 귀리는 ‘휘발유’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콜린스 영어 사전 캡처]

하지만 맛이 없는 건 여전했습니다. 영어 사전을 보면 오트밀을 묽게 쑨 그루엘(gruel)의 또다른 뜻은 ‘처벌(punishment)’이라는 뜻입니다. 오트밀 죽 먹기가 얼마나 고역이었으면 벌받는다는 의미가 더해졌는지 알겠죠. 산업혁명 초기 오트밀은 교도소, 고아원, 수녀원 등 시설의 단골 배식 메뉴였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도 주인공 올리버가 구빈원에서 “한 그릇만 더 달라”고 애원했다가 작업장 주인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도 등장한 음식이 ‘그루엘’입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 올리버가 구빈원 작업장에게 그루엘 한그릇을 더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빈민층과 불행을 상징하던 오트밀이 서민 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884년 기계식 압착기의 발명 덕입니다. 귀리를 쉽게 가공해 먹을 만해졌으며 19~20세기 동안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귀리는 ‘현대인들의 아침 식사, 시리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실제로 타이타닉호에서 3등석의 아침 식사에 오트밀 죽이 메뉴로 나와있기도 하죠.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오트밀의 이미지 변신에는 ‘퀘이커 오트’사의 공이 컸는데요. 퀘이커는 1877년 미국의 한 시리얼 회사가 '퀘이커 오트' 상표를 등록하며 탄생했습니다. 퀘이커는 청교도라는 뜻으로 당시 청교도인들처럼 정직한 품질의 상품을 생산하는 이미지를 노렸다고 합니다. (정작 청교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다 브랜드를 매입한 헨리 크로우웰이 1882년 아침용 시리얼에 대한 미국 최초의 잡지 광고를 전개했습니다. 그렇게 오트밀에 대한 이미지를 건강한 현대인의 아침 식사로 180도 바꿔 놨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살모넬라균 검출로 인한 리콜 사태를 겪고 오트 제품에 살충제 성분이 검출되면서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오트밀 라구 리소토, 신주희 기자

스코틀랜드 비하 음식이던 오트밀은 이제는 한국까지 건너와 자취생이 '즉석밥' 대신 택할 만큼 대중화됐습니다. 또 국내에서 귀리로 만든 식물성 대체 음료 시장도 급성장 중입니다. 저 역시 오트밀은 거의 한 달간 밥 짓기 귀찮을 때 ‘치트키’로 쓰던 식재료입니다. 시도 안 해본 레시피가 없을 정도인데요. ▷오트밀 크림 리소토 ▷오트밀 참치미역죽 ▷샤브샤브집 후식 죽 뺨치는 오트밀 야채죽 ▷오트밀 닭죽 등 레시피도 무궁무진합니다. 원팬으로 요리하기 제격인데다가 도시락으로 간편하게 먹기 좋습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재료 (소스 2인분 기준) 올리브유 1t, 양파 한 개, 버섯, 간 소고기200g, 시판 토마토 소스 320g(2인분), 오트밀 40g (4스푼)

1. 양파를 잘게 다집니다.

2. 기름을 넣고 다진 소고기와 함께 양파를 볶습니다. 어느 정도 익으면 후추를 더합니다.

3. 토마토 소스, 버섯을 넣고 함께 끓입니다.

4. 소스가 끓으면 1인분 양으로 덜어놓고 오트밀, 물 약간을 넣고 3분간 끓입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양파를 다질 때는 양파의 끝을 남겨두고 세로로 칼집을 촘촘히 넣으면 됩니다. 그 다음 가로 방향으로 칼집을 넣으면 보다 수월하게 양파를 썰 수 있습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

오트밀은 한 큰 술 가득 10g으로, 숟가락으로 계량하면 편합니다. 보통 1인분에 약 40g 정도이니 네 스푼이면 충분합니다. 40g의 칼로리는 약 130~140㎉ 수준으로, 불었을 때 양은 밥 한공기와 비슷하지만 칼로리는 훨씬 적습니다. 지난번 로마식 까르보나라를 해먹고 남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뿌려 풍미를 더했습니다. 버섯은 3주마다 채소 구독 서비스로 받은 ‘흰만가닥버섯’을 넣었습니다. 양송이, 새송이 버섯 등 양식에 잘 어울리는 버섯을 넣어주어도 괜찮습니다.

“사료를 왜 먹어” 무시 당했는데…‘톱스타 다이어트식’의 대반전 [퇴근 후 부엌-오트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