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뉴클래식 프로젝트’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형민 감독 리마스터링 버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밥 먹을래, 나랑 사귈래?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 (‘미안하다 사랑한다’ 대사 중)
Y2K의 귀환이다. 그 시절 힙하다는 거리에선 임수정의 어그 부츠와 무지개 니트가 20대 여성들의 인기템이 됐고, 어딜 가나 박효신의 ‘눈의 꽃’이 흘러나왔다. 드라마는 이른바 ‘미사 폐인’을 만들어내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20년 전 청춘들을 설레게 한 드라마가 돌아왔다. 머리에 총알이 박힌 시한부 입양아 차무혁(소지섭 분)과 송은채(임수정 분)의 죽음도 거스르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미안하다 사랑한다 2024’다.
웨이브 ‘뉴클래식 프로젝트’ 파트2를 통해 ‘미안하다 사랑한다’ 리마스터링 감독판 버전에 내놓은 이형민 감독은 “무혁과 은채의 이야기에 중점을 둔 엑기스 버전”이라고 말했다.
총 16부작인 드라마는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통해 2024년의 시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복되는 장면이나 늘어지는 정서는 과감하게 정리했다”는 것이 이 감독의 귀띔. 그 결과 원작의 3분의 1 수준인 6편 짜리 압축 버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감독을 비롯해 편집 감독, 음악 감독 등 원작 제작에 참여한 주요 스태프들이 오랜만에 다시 뭉쳤다.
‘감독판’ 버전을 만들며 고심도 깊었다. 그는 애초 한 편의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당시 스태프와의 회의 끝에 “지나치게 달라지면 기존 팬들의 원성이 클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분량은 줄었지만, 주요 장면은 손대지 않았다.
이 감독은 “은채와 무혁이의 명장면은 단 한 프레임도 버린 것이 없다”며 “버려진 입양아인 무혁이의 슬픈 느낌이 나는 호주에서의 장면들도 거의 줄이지 않았다”고 했다.
드라마는 2004년에도 감각적이었다. 두 주인공은 많은 말 대신 서로의 눈빛과 표정으로, 그들을 감싸는 공기로 연기한다. 비극을 향해가는 두 사람의 서사는 이들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
이 감독은 “이 드라마가 특이한 점은 대사가 많지 않고 지문이 많다는 점이다. 표정 하나, 느낌 하나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에 편집 과정에서도 행여나 잘린 프레임이 없는지 확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자 ‘로코’ 속 주인공들의 행동과 대사도 재평가됐다. 호주로 입양간 ‘버려진 아이’ 무혁의 폭력 성향과 운전대를 잡고 소리친 명대사 ‘밥 먹을래, 나랑 사귈래’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이 감독은 “전두엽에 총을 맞아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차무혁은 당시 드라마로도 일반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며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이었다. ‘모래시계’의 이정재처럼 선함이나 따뜻함을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을 찾아 해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이 생각하는 차무혁은 ‘거리의 아이’였던 만큼 ‘삐딱한 사람으로 보여야 했다. 그는 “그렇다고 실제로 삐딱하면 범죄자처럼 보인다. 소지섭은 맑고 슬픈 눈빛이 이 역할과도 너무 잘어울렸다”며 “과장해서 우는 걸 싫어하는데, 참을 수 있으면 눈물을 참으라고 했다. 그러니 배우들이 뒤로 갈수록 눈물이 저절로 나는데 아무렇지 않게 연기했다. 그런 슬픈 느낌을 잘 표현했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지하철에서 은채가 “사랑해”라고 소리치는 때다. 이 감독은 “말없이 받아주는 무혁이가 슬픔을 참는 눈빛이 너무 좋았다. 다시 보는데도 울컥했다”며 “소지섭·임수정 두 배우의 이른바 ‘리즈 시절’(전성기)을 담았고, 또 그 연기가 오늘날의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이었다”고 돌아봤다.
드라마는 이 감독이 고집스럽게 지킨 촬영 철칙으로 아련하고 아득한 정서가 자리한다. 세트장보다 자연광이 드는 외부 촬영을 선호했던 탓에 장소 선정과 촬영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만의 애틋함이 만들어졌다. 이 감독에 따르면 드라마에 나오는 거실과 모텔, 여인숙 등도 지어진 세트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찍었다. 모텔에서 무혁과 은채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양말에서 물이 떨어지고, 커피포트가 끓는 장면들은 드라마의 정서를 만드는 역할이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몇 년 전까지 ‘재방송이 가장 많이 된 드라마’였고, 3040 세대를 중심으로 유튜브에서 ‘띵작’(명작) 다시보기가 이뤄지고 있는 작품이다. 슬픈 감성이 지배하던 시대의 드라마였지만, 남녀 주인공이 모두 죽는 드라마는 흔치 않아 시청자들에게 더 깊이 남은 작품이기도 하다. “‘순수한 사랑’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했던 창작진의 의도였다”는 게 이 감독의 설명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20년 전에도 특이한 멜로 드라마였어요. 재벌가 남성, 선남선녀가 카페에서 대화하는 그런 드라마들이 나오던 시절에 거칠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뤘죠. 리마스터링 과정에선 원작의 결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어요.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지금까지 사랑을 받은 건 이 드라마가 여전히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