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할 기념비적인 순간에 부산이 어떻게 기록될지는 협약의 성안 자체보다 협약이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일 부산 벡스코 컨벤션홀에서 국내 환경단체들이 모인 ‘플라스틱 문제를 뿌리 뽑는 연대’(플뿌리연대)는 한국 정부의 역할을 다시금 촉구하며 이같이 밝혔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25일부터 열린 ‘해양 환경을 포함한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국제협약’을 마련하는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는 이날 끝맺어야 한다. 그러나 일주일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협상에도 불구하고 당사국들은 초안을 놓고 아직도 다투고 있다.
협상위를 이끄는 루이스 바야스 발비디에소 의장은 이날 오후 1시 22쪽 분량의 ‘의장 문건’(Chair’s Text)를 내놓았다. 이 문건을 두고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제5차 협상위의 마지막 본회의가 시작됐다.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 협상위가 오는 3일까지 연장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날 발표된 의장 문건을 포함해 발비디에소 의장은 최근 협상 초안을 지속해서 업데이트해 왔다.
지난 10월 말에는 그간 네 차례에 걸친 협상 내용이 담긴 77쪽 분량의 초안을 17쪽으로 축약한 제3차 비문서(Non-paper 3)를 내놓고, 이를 부산에서 열리는 제5차 협상위의 출발점으로 둘 것을 제안했다. 짧은 실랑이 끝에 중국과 한국 정부의 설득으로 협상 첫날인 25일 당사국들은 초안을 받아들이고 협상을 시작했다.
이후 지난 29일 발표된 ‘의장 제안’(Chair‘s Proposal)에는 당사국 간 의견 충돌이 팽팽하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 의장 제안은 45쪽 짜리 초안으로, 제4차 협상위를 마칠 당시 초안보다는 분량이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문구마다 이견이 있음을 표시한 ‘괄호’가 셀 수 없이 많은 데다 조항마다 선택 폭을 넓히는 ‘옵션’이 달렸다. 가령 ‘플라스틱’의 정의를 두고는 옵션이 8가지에 달했다.
특히 협약 최대 쟁점인 ‘1차 플라스틱 폴리머’(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플라스틱 원료) 생산 감축을 두고 가능성을 남겨 환경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첫 번째 옵션은 ‘첫 번째 협약 당사국 총회 때 1차 플라스틱 폴리머를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전 세계적 목표를 담은 부속서를 채택한다’는 안이었다. 제5차 협상위 초반부터 발비디에소 의장이 강조해 왔던 대로 이번 협약에서는 큰 틀에서 합의하고 내년 열릴 회의에서 세부 사항을 정하자는 내용이다.
두 번째 옵션은 ‘조항 없음’이었다. ‘공급과 지속 가능한 생산’을 논하는 제6장을 아예 협약에서 빼자는 이야기다. 이를 두고 플라스틱 생산 감축이 빠진 채 협약을 성안할 길을 열어줬다는 지적이 나왔다.
에이릭 린데붸에르그(Eirik Lindebjerg) 세계자연기금(WWF) 글로벌 플라스틱 정책 책임자는 “각국이 이 초안에 반영된 낮은 수준의 목표를 수용하지 않을 것을 촉구한다”며 “높은 목표를 가진 국가들은 생산 단계에서의 조치가 최종 협약문에 포함되도록 입장을 고수하고, 의지가 있는 국가 간에 보다 야심 찬 협약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나온 ‘의장 문건’은 이틀 전 나온 ‘의장 제안’ 대비 분량이 45쪽에서 22쪽으로 절반으로 줄었다. 당사국 간 이견을 나타내는 ‘괄호’도 300여 개 줄어들었다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대한 조항은 오히려 복잡해졌다. 제6장의 제목을 ‘공급’으로 할지, ‘지속 가능한 생산’으로 할지 정하지 못했다. 제6장 자체가 빠지는 옵션도 여전히 유효하다.
플라스틱을 두고 감축(reduce)할지, 유지(maintain)할지, 관리(manage)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해 괄호친 채 나열됐다. 이틀 전까지는 “폴리머 생산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줄이기 위해 세계적 목표를 채택한다”며 ‘감축’이 명시돼 있었다. 그 대상 역시 플라스틱의 ‘생산’, ‘생산과 소비’, ‘생산·소비·사용’ 중 어느 문구로 낙점될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지난 일주일 간 제일 쟁점이 됐던 제3조(플라스틱제품)와 제6조(생산), 제11조(재정 매커니즘) 외 나머지 조항들에는 ‘괄호’가 많이 지워졌다”며 “당사국 간 의견이 다양하다 보니 의장이 표명된 당사국의 의견을 모두 반영한 채 발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국내외 환경단체들은 마지막 날까지 한국 정부가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포함한 강력하고 법적 구속력 있는 플라스틱 협약을 성안하는 데에 힘을 보탤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른 당사국들은 이미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파나마는 91개 국가를 대표해 지난 28일 발비디에소 의장이 제시한 옵션 중 ‘첫 당사국 총회에서 1차 플라스틱 폴리머 감축목표를 담은 부속서를 채택하는 방안’을 지지하는 제안서를 내놨다. 현재 100여개국이 이를 지지했다.
한국 정부는 파나마 성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협약에 포함해야 한다는 캐나다 정부 주도의 서명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성명은 지금껏 협상위를 열었던 우루과이·프랑스·케냐·캐나다 등 ‘개최국 연합’ 장관 명의로, 유엔 공식 문서로 올라갈 수 있는 파나마 성명의 파급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설명이다.
플뿌리연대는 성명을 통해 “한국 정부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앞두고 이미 플라스틱 생산감축의 의지를 표명한 바 있지만, 협상 과정에서 생산 감축에 대한 행보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한국 정부가 개최국으로서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레이엄 포브스 그린피스 글로벌 플라스틱 캠페인 리더는 “협약 초안은 여전히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양한 선택지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협상 회의 종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협상단은 플라스틱 생산 감축과 궁극적인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목표로 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