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사그마이스터·유지원 패널 토크

매끈한 픽셀의 범람 너머 ‘손의 저항’

“시간, 안목, 선택에 대한 책임감 필요”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김현경 기자] “오토바이를 타면 누구나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100m를 9초대에 주파하는 우사인 볼트의 달리기에 환호합니다. 기계를 쓰면 더 빠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두 발로 달린 인간의 노력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죠. 디자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직접 들인 정성과 수고의 자리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의 직관은 단호했다. 효율성을 극대화한 ‘기계의 속도전’ 앞에서 인간의 육체적 땀과 고단한 노동만이 예술적 오리지널리티를 증명하는 마지막 징표가 된다는 통찰이다.

타이포그래퍼인 유지원 글문화연구소 소장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전했다. 유 소장은 “디지털 화면에 찍히는 매끈한 점과 거친 종이 위에 번지는 먹물 한 방울은 전혀 다른 감각을 준다”며 “잉크는 번지려 하고 종이의 섬유질은 이를 댐처럼 가로막는 미세한 부딪힘 속에서 일종의 생동감이 피어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아날로그가 주는 온기는 단지 과거를 그리워하는 복고적 향수가 아니라, 손끝에 닿는 실제 물질이 서로 반응하며 생겨나는 감각”이라고 환기했다.

단 몇 줄의 프롬프트만으로 불과 몇 초 만에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고해상도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시대. 기술적 완성도가 극점에 달해 시각적 결과물이 범람하는 부스러기(AI Slop)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지금, 디자인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쓰나미 같은 기술의 습격으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손을 통한 ‘물리적 저항’과 ‘신체적 노력’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갈망이 커지고 있다.

2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디자인라운지 2026’에선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진준 카이스트(KAIST) 교수가 좌장을 맡아 ‘기술이 디자인 방식을 바꾸는 시대, 인간만의 고유한 역할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패널 토크를 진행했다.

유지원 글문화연구소 소장이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유지원 글문화연구소 소장이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이미지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 지금, 인간이 기계의 작업물에 가지는 감정은 다양하다. 사그마이스터는 작금의 대중은 인공지능이 손쉽게 쏟아내는 결과물에 급격한 피로를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기계가 노력 없이 대량으로 만들어낸 콘텐츠에 사람들이 빠르게 질려버렸다”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술적 이미지는 놀라워 보였으나 이젠 열두 살 아이조차 ‘기계가 만든 것’이라며 쉽게 넘겨버린다”고 꼬집었다.

그는 어도비(Adobe) 이사회 시절 인공지능으로 이메일 초안을 작성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내 기계와 상대 기계가 대화하게 두는 구조는 우스꽝스럽다”고 일갈했다. 기계는 내가 지시한대로 이메일을 작성하지만, 결과는 전혀 내 목소리 같지 않았고 끔찍했다는 것. 그에게 소통은 ‘기계끼리의 연산’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마주 닿는 데에 의미가 있다.

형태 너머 ‘아름다움의 본질’을 향한 시선에선 팽팽한 지적 긴장이 감돌았다. 사그마이스터는 아름다움은 개인의 주관에만 머물지 않는 ‘객관적 실재’라고 봤다. 그는 “전 세계인이 파란색과 원형을 선호하고, 그랜드 센트럴처럼 아름다운 역에 있을 때 사람들의 공격성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아름다움에는 보편적 합의가 존재하며, 시각 환경은 사람의 행동을 실제로 바꾼다”고 역설했다.

반면 유 소장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규정할 때 ‘단어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그는 “모더니즘의 반듯한 기하학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면, 기후와 삶에 맞춰 발달한 아랍의 무샤라비야나 인도의 잘리 같은 지적인 조형이 ‘비이성적인 장식’처럼 여겨져 배제될 수 있다”며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환경, 물질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상대적 존재”라고 짚었다.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2일 오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헤럴드 디자인 라운지(HERALD DESIGN LOUNGE) 2026 패널토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다만 기계가 결코 넘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마음’이라는 점에는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다. 치매 환자를 위한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고 있는 유 소장은 “기억과 인지가 완전히 무너져도 인간이 끝까지 붙드는 단 하나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마음’”이라며 “디자이너는 기술의 편리함 안에 갇힐 것이 아니라 기술 바깥에 서서 인간의 삶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면 속 가상 이미지 역시 유한한 육체를 지닌 인간의 감각과 맞닿아야 비로소 온기를 얻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술적 제작 능력이 평준화된 시대, 창작자의 생존 무기를 두고도 통찰이 오갔다. 사그마이스터는 19세기 사진술의 등장이 사실적 묘사 기술의 가치를 단숨에 떨어뜨렸듯, 렌더링 기술은 이미 가치를 잃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악기를 다루지 못해도 명반을 빚어낸 프로듀서 릭 루빈, 레이아웃도 헬베티카 서체도 모른다고 공언했으나 전설이 된 디자이너 티보 칼맨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핵심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강력한 취향과 일을 실제로 구현해내는 카리스마”라며 “기술 숙련도보다 ‘이 강력한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밀어붙이는 창작자의 뚜렷한 비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소장은 개인의 카리스마를 넘어 거대 시스템의 틈새를 메우는 ‘비판적 데이터 읽기’와 ‘공동체적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거대언어모델(LLM-Large Language Model)의 결핍을 포착하며 메타적으로 조망하는 신작 구상 ‘단어의 군자리들’을 소개한 그는 “데이터 셋 전체를 보면 언어가 턱없이 부족한 빈자리가 드러나는데, 그곳은 늘 사회적 약자들의 몫”이라며 “결핍의 자리를 찾아내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여백에 시를 써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거대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아찔한 간극을 동료들과의 ‘휴먼 스케일 공동체’로 메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변화하는 시대를 통과하는 창작자들은 ‘기술의 편리’에서 ‘이기’를 보며 매일의 불안을 키워가고 있다. 좌장을 맡은 이진준 교수는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몸으로 부딪쳐 겪어낸 시간과 타인의 결핍을 발견하는 안목, 선택에 책임을 지는 태도”라며 “매끄러운 기술의 표면 너머 인간의 땀과 고민이 밴 불완전한 자리야말로 디자인이 끝내 지켜내야 할 가장 존엄한 영토”라고 힘줘 말했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세상은 점점 나아져…한국의 변혁 놀라워”[헤럴드디자인라운지 2026]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세상은 점점 나아져…한국의 변혁 놀라워”[헤럴드디자인라운지 2026]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1825년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곳이었습니다. 100년 뒤인 1925년에는 18곳, 2025년에는 85곳으로 늘었습니다. 세상을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모
https://biz.heraldcorp.com/article/10892259?sec=014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