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반란 실패후 다리 힘줄잘린 두 왕자

뗏목 실려 강물에 무기약 표류 형벌

참혹한 그림 속 무슨 메시지 있을까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왕비는 두 아들을 봐주지 않았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일부 확대),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일부 확대),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왕비님.

아니,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시여.

왕비 바틸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뜻을 거둬주시옵소서.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주시길 애원합니다.” 두 왕자가 울면서 호소하고, 바닥으로 머리를 찧어도 그랬다.

바틸드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옆을 봤다. 그곳에는 왕 클로비스 2세가 있었다. 그는 이곳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메로비우스) 왕조의 수장이자, 그녀의 일곱 살 연하 남편이었다. 눈물짓는 두 아들을 바라보는 그도 괴로운 표정이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최소한의 자비를 베푸는 건 어떻소.” “왕이시여. 명심하세요. 이것은 우리와 조국, 두 부모를 함께 욕보인 일입니다.” 바틸드는 단호했다. 클로비스 2세는 그 일관된 태도에 재차 말을 잇지 못했다. “됐고, 왕께서 직접 선언하세요.” 바틸드가 말했다. 여전히 두 아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끌고 가거라.” 클로비스 2세가 입을 열었다. 이는 양쪽에 선 호위병들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확실히 하거라.” 클로비스 2세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왕비의 말대로, 힘줄이란 힘줄은 모조리 태우라는 것이다. 두 녀석 모두 다시는 자기 발로 일어설 수 없도록.” 육중한 갑옷이 움직였다. 사슬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어머니. 제발!” 이제 궁정을 맴도는 건, 점점 작아지는 절규뿐.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칠페리크(Chilperic)의 죽음, 1885, 리옹 시청 [Hôtel de ville de Ly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칠페리크(Chilperic)의 죽음, 1885, 리옹 시청 [Hôtel de ville de Ly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12세기경 만들어진 전설에 따르면, 660년 무렵 클로비스 2세의 두 아들은 자국 내 반역을 꾀했다.

때마침 클로비스 2세가 나라를 비운 시점이었다. 그가 국정 공백을 없애고자 왕좌에 대신 앉힌 장남. 녀석이 동생을 꼬드겨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러나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왕비 바틸드가 궁에 남아 있었다. 낌새를 눈치채고 곧장 클로비스 2세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를 전해 받은 클로비스 2세는 서둘러 마차를 멈춰세웠다. 돌아오는 길, 그는 두 아들이 일으킨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었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과는 반란군의 참패였다.

클로비스 2세도 포로로 붙잡은 아들 둘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다만, 단칼에 목을 칠 마음이었다. 질질 끄는 고통을 면해주기 위한 마지막 호의였다. 하지만 바틸드가 강하게 반대했다. 감히 부모를, 심지어 조국에도 칼을 댄 배은망덕은 최악의 응징으로 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리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를 마냥 거부하기에는 그녀의 배신감이 화산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바틸드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었다. 얼마 후 “두 다리의 힘줄을 태워 움직이지 못하게끔 하고”, “센강에 띄워버려 영영 표류시켜버리는” 형벌은 착실히 이뤄졌다. 긴긴 시간 꼼짝할 수 없는 몸, 서서히 굶어 죽든 잠겨 죽든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흰 천으로 싼 다리, 결국…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두 왕자가 나란히 누워있다.

그런데, 등이 닿은 곳은 침대가 아닌 뗏목이다. 장소 또한 침실이 아닌 푸르스름한 강기슭이다. 이들의 표정은 어둡다. 괴롭거나 아프고, 슬프거나 지친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답은 흰 천으로 싼 다리에 있었다. 거기에는 이제, 멀쩡하게 붙어있는 힘줄이 없었기에. 벨벳 쿠션은 크고 푹신하다. 화려한 옷과 담요 또한 왕실 물품인 게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노는 보이지 않는다. 도구도, 식량도 딱히 실린 게 없어보인다. 배 끝머리에는 보석이 박힌 금색 장식품만 걸려있다. 그 안에는 하필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드는 조각상도 들어있다. 공허한 하늘, 적막한 들판, 무심한 물살…. 이 모든 게, 고요 아닌 기괴한 공포감만 더할 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반역의 대가로 삶도, 몸도 그저 흘려보내야 한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바레스트 비탈 뤼미네의 그림,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이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일부 확대),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일부 확대), 1880, 캔버스에 유채, 190.7x275.8cm,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commons.wikimedia.org]

이는 권력을 둘러싼 잔혹한 이야기다.

다만 꼭 알아야 할 게 있다. 앞서 이미 전설이라고 짚었듯, 이것은 거의 확실하게 실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클로비스 2세는 657년에 스물넷 나이로 진작에 요절했다. 그에게 아들이 셋이나 있긴 했지만, 이들 모두 줄줄이 왕위에 오르기만 했다. 힘줄이 태워지는 형벌 따위도 당연히 받지 않았다. 실은 이렇듯 내용에 빈틈이 많은 만큼, 먼 과거에서도 이미 허구로 치부되던 에피소드였다. 뤼미네도 이 사연에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알았다. 그럼에도 이토록 정성껏 그렸다. 심지어 같은 주제로 여러 점을 작업했다. 그림 속 인물 표정과 배경, 소품을 살짝 바꿔두는가 하면, 이들 아닌 다른 인물의 형상을 담은 적도 있었다. 국왕 부부와 왕자들 사이 비극에 그렇게나 감화한 탓일까. 이 또한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결정적 이유는 더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보불전쟁에서의 뜻밖 패배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로마 앞의 골족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73x100cm, 됭케르크 미술관 [kunst-fuer-alle.de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로마 앞의 골족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73x100cm, 됭케르크 미술관 [kunst-fuer-alle.de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뤼미네가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을 완성하기 10년 전인 1870년의 겨울.

그의 조국 프랑스는 날씨만큼이나 혹독한 추위를 맞고 있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 적군 프로이센이 그토록 강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상 먼저 주먹을 뻗은 곳은 프랑스였다. 그해 7월, 프로이센을 상대로 호기롭게 선전포고까지 했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었다. 프로이센은 이와 견줘볼 때 비교적 신생국에 불과해보였다. 당연히 큰 형이 막내의 손목을 비트는 식으로 싸움은 끝날 줄 알았다. 오판이었다. 프로이센은 강했다. 이 나라는 충돌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작부터 참모본부 격의 체계를 갖추고, 그곳에서 빚어내는 고도의 전략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프랑스의 연전연패였다. 그 결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붙잡히는 굴욕도 당했다. 금싸라기 땅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당시 국가 예산 2~3배격의 50억 프랑을 배상금으로 내야 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수도 파리는 포위와 내분에 따른 피로 물들었다. 최악이었다. 당시 도시를 짓누른 건 공포와 상실감, 무력함과 패배주의였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로마인과 골족의 전투,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카르카손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e Carcassonn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로마인과 골족의 전투,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카르카손 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 de Carcassonn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인간과 사회는 내몰릴수록 과거의 극적 서사를 그리워하는 법이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꿈틀대는 현실도피의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대중은 조국의 아득한 고대와 중세 역사를 돌아봤다. 국가 또한 이를 부추겼다. 우리와 가깝게 선 전설과 역사를 발굴, 홍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떨어진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골족 약탈자들, 1867, 캔버스에 유채, 210x318cm, 랑그르 예술 및 역사 박물관 [fotosearch.fr2. gettyimages.co.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골족 약탈자들, 1867, 캔버스에 유채, 210x318cm, 랑그르 예술 및 역사 박물관 [fotosearch.fr2. gettyimages.co.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481년에 세워진 프랑크 왕국은 중세 초 서유럽과 중부유럽 쪽의 존재감이 큰 국가였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자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인 클로비스 1세. 그는 파리를 수도로 두고 군을 이끈 정복 군주였다. 그는 흩어진 프랑크 부족을 통합하고, 당시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 왕국 등을 공격해 영토도 눈에 띄게 넓혔다. 이후 360여년간 역사를 이어가며 카롤루스 마르텔과 카롤루스 대제 등 굵직한 인물도 여럿 배출했다. 물론 흑역사가 없지는 않지만, 그만큼 극적이고 격동적인 사건이 많았다. 프랑크라는 말 자체는 프랑스의 기원으로 통하기도 한다. 즉,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일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야기는 당시 국가와 대중 모두의 입맛에 맞는 소재였다. 국가는 이를 통해 자부심을 챙기고, 국민은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사무치는 정서 속 피어나는 위로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 초기 구상, 캔버스에 유채, 41x32cm, 루앙 미술관 [lemondedesarts.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 초기 구상, 캔버스에 유채, 41x32cm, 루앙 미술관 [lemondedesarts.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전쟁의 트라우마는 끈질기고 두터웠다.

뤼미네가 살롱전에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을 내놓은 그때도 프랑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글썽였다. 두 왕자의 화려한 옷과 이불을 보고 조국의 옛 영광을 돌아봤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표류하는 모습 앞에선 당장의 암담한 현실을 되새겼다. 두 왕자의 눈빛은 멍하다. 의욕도, 의지도 없다. 과거의 찬란함 따위 찾을 힘도, 마음도 잃었다. 주권은 유린당했으며, 미래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심지어 모든 상황의 발단은 당사자들이 품은 오만이었다. 그 사실이 보는 이들을 더 눈물짓게 했다. 그러니까, 뤼미네는 역사적 진위를 따질 생각이 없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건 사실 아닌 정서였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을 위한 습작, 판지에 유채, 36.5x48.5cm, 루앙 미술관 [jumieges.free.f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을 위한 습작, 판지에 유채, 36.5x48.5cm, 루앙 미술관 [jumieges.free.f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런데, 실은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수도사가 쥐미에주(Jumieges·노르망디 지방)에서 죽기 직전의 이들을 발견한다. 고심 끝에 구해주기까지 한다. 수도원으로 둘을 안고 가고, 옷과 음식도 내어준다. 철없던 두 왕자는 그때부터 독실한 수도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왕비이자 어머니, 바틸드가 이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재차 응징을 가했을까.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들 몰래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사를 한 장소로 불러 모아… 외려 감사를 표했다. 바틸드 또한 뒤에서는 타들어 가듯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국가의 기강을 잡기 위해 극도로 냉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둘은 그녀의 자식들이었다. 살아남은 데 내심 깊이 안도한 것이다. 그녀는 수도원에 막대한 지원금을 줬다. 나라 소유의 주변 땅까지 기부했다. 막막했던 여정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쥐미에주의 힘줄이 끊긴 사람들), 1880년 이후, 캔버스에 유채, 197x276cm, 루앙 미술관 [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쥐미에주의 힘줄이 끊긴 사람들), 1880년 이후, 캔버스에 유채, 197x276cm, 루앙 미술관 [Bridgeman Art Librar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뤼미네가 그린 또 다른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쥐미에주의 힘줄이 끊긴 사람들)>을 보면, 이번에는 뗏목의 끝단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꽃이 피어나고 있다. 힘줄은 여전히 끊어져 있지만, 이로 인해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감 이상으로 위로의 감정까지 느끼게 했다. 1880년 살롱전에 걸린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은 당시 가장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한 점으로 꼽혔다. 우리의 옛날을 사무치게 돌아보고, 직전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으며, 고질적 무기력함 속 보듬음을 받고 싶은 정서. 뤼미네는 문제 앞에서 정답을 말하듯 시대 맞춤형 ‘블록버스터’를 그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흥미로운 추론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을 움직인 수완 좋은 화가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케를라즈의 목동, 1852, 캔버스에 유채, 85.5x115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케를라즈의 목동, 1852, 캔버스에 유채, 85.5x115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뤼미네는 상당히 영리한 화가였을 것이다.

그는 그림도 그림이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대중의 호응을 받을 그림 그리기에 감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뤼미네는 1821년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법조인과 의회 의원을 여럿 배출한 명문가였다. 증조부는 검사였다. 조부는 정치인 겸 변호사였다. 아버지 또한 지역구가 있는 하원 의원이었다. 모두 본질은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었다. 뤼미네는 그런 어른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인간 마음을 읽고, 대중 시선을 끄는 법 등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뤼미네는 18세 나이로 파리 땅을 밟았다.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레옹 코니에와 콩스탕 트루아용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코니에는 역사화와 초상화, 트루아용은 풍경화와 동물화에 일가견이 있었다. 덕분에 여러 분야를 빠짐없이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마주하며 직접 가늠할 수 있었을 터였다. 동시대 사람들은 무슨 그림을 좋아하고, 특히나 어떤 주제에 열광하는지를.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해변 바위가의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73x60cm [Pillon, Versaille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해변 바위가의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73x60cm [Pillon, Versailles,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뤼미네는 1843년, 살롱전에 <공화정 시기, 바스브르타뉴의 내전 장면>을 내놓고 호평을 받았다. 성공적인 공식 데뷔였다. 이는 과거 프랑스 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내전을 옮겨 담은 역사화였다. 현재 원본은 소실돼 볼 수 없다. 뤼미네는 이어 고향 일대 농부와 어부를 그렸다. 개와 말을 묘사하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있는 전원 풍경도 선보였다. 살롱전에서 상도 여럿 받았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역사화의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 시절 아카데미가 최고로 친 그림은 신화화와 역사화류였다. 보다 확실히 돈도 벌고, 명성도 쌓아 올릴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패배 후 ‘프랑스적인’ 옛 역사의 재조명도 이뤄졌다. 뤼미네는 분위기를 살폈다. 대중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을 주제를 따졌다. 그래서 내놓은 게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과 같은 작품이었다.

추론의 결론은 이렇다.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은 뤼미네의 애국심, 나아가 그가 일찌감치 시장성을 따지고 계산한 결과가 합해져 나온 작품일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둘 중 비중이 큰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기에 성공했다.

나아가, 뤼미네의 영리해보이는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양익 모두… 보고 싶은 것을 봤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마지막 메로빙거, 1883, 캔버스에 유채, 210x172cm, 카르카손 미술관 [Tylwyth Elda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마지막 메로빙거, 1883, 캔버스에 유채, 210x172cm, 카르카손 미술관 [Tylwyth Eldar,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림 속 붉은 머리의 남자는 피핀 3세(카롤루스 왕조 개창자)에 의해 폐위당한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킬데리크 3세다.

예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그 시절 왕은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의 대리자로서, 머리카락 또한 신이 내린 만큼 함부로 날을 댈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화폭에 있는 킬데리크 3세는 무기력하게 머리카락을 내어준다. 수도사들은 결박당한 몸을 누른 채 무심하게 가위질을 한다. 킬데리크 3세는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그렇게 왕의 자격을 잃고 있다. 왕관과 붉은 망토 또한 땅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뤼미네의 그림 <마지막 메로빙거>다. 뤼미네는 이 그림도 철저한 계산과 상상 끝에 그렸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일단, 이번에도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처럼 모두의 이목을 끌 만한 소재였다. 소재만으로는 부족했다. 확실한 성공을 위해선 보불전쟁 이후 더 극명하게 갈린 세력, 이른바 왕당파 계열과 공화파 계열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했다. 성공한 듯보였다. 왕당파 측은 옛 왕조의 굴욕적인 쇠락을 두고 비감, 이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공화파 측은 절대적 왕권의 종식 앞에서 은근한 쾌감, 이로 인한 통쾌함까지 마주할 수 있었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그라들롱의 탈출,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0x311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그라들롱의 탈출,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0x311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뤼미네는 <그라들롱의 탈출> 또한 비슷한 의도를 갖고 작업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북서부 두아르네네즈만, 이곳에 있었다는 허구의 도시 이스(Ys)와 얽힌 전설을 담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5세기 무렵 왕 그라들롱이 통치한 이스는 금과 대리석이 넘쳐나는 상업 중심지였다. 다만, 이곳에는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닷물을 막고 터를 잡았기에 사실상 수중 도시와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문 달린 제방이 도시를 성벽처럼 둥글게 두르고 있기는 했다. 그렇기에 재난 걱정이 크게 없었는데…

마녀 또는 막무가내 여인으로 묘사되는 그라들롱의 딸, 다후트. 그녀가 사고를 친다. 그라들롱의 열쇠를 훔쳐 수문을 한 번에 다 열고 만다. 바닷물은 점령군이 진격하듯 도시로 밀려왔다. 그라들롱은 성(Saint) 귀놀레의 도움을 받고 허겁지겁 말에 올랐다. 뒤늦게 사색이 된 다후트는 모르는 척 아버지에게 매달려 함께 탈출하고자 했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그라들롱의 탈출(일부 확대),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0x311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그라들롱의 탈출(일부 확대),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200x311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네 딸 다후트가 잘못을 했노라.”

이때, 그라들롱은 성 귀놀레의 음성을 듣는다. 몰려드는 파도, 형태도 없이 사라지는 낙원의 땅…. 그라들롱은 다후트를 본다. 그의 핏줄이었다. 자신을 쏙 빼닮은 혈육이었다. 내가 평생을 돌본 딸? 그것을 이 사태의 면죄부로 삼아야 하는가? 그라들롱은 고민했다. 그 결과, 딸을 말 아래로 밀쳐버린다. 이렇듯 그의 결론은 용서 없는 응징이었다. 왕당파 계열은 이 그림 앞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잘못 앞에서는 자식조차 단죄할 줄 아는, 그런 강력한 카리스마의 올바른 군주상이 담겼다고. 다만 공화파 계열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앞서서는 국왕 부부가 자식의 힘줄을 태웠다. 이번에는 당장 자기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이를 떠밀어버린다. 그런 잔혹한 군주상은 지금의 시대와는 맞지 않다는 점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고. 뤼미네는 이번 그림으로도 양측 모두의 마음을 울렸다. 또 성공이었다.

확실한 건, 성공했다

에바레스트 비탈 뤼미네, 사냥에서의 귀환, 1861, 캔버스에 유채, 117x90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두 남자가 매복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기 왕당파 계열 반란군들의 특징인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 노리는 사냥감이 새나 토끼인지, 공화국 군대인지 모호하다. 이 그림 또한 이런 식이었다.
에바레스트 비탈 뤼미네, 사냥에서의 귀환, 1861, 캔버스에 유채, 117x90cm, 캥페르 미술관 [Google Arts & Cultur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두 남자가 매복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기 왕당파 계열 반란군들의 특징인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 노리는 사냥감이 새나 토끼인지, 공화국 군대인지 모호하다. 이 그림 또한 이런 식이었다.

뤼미네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이러한 반응을 정확히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직접적인 말과 기록이 없는 한 추론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뤼미네가 이러한 기류로 인해 상당한 덕을 본 건 사실이다. 앞서 살롱전에서 화제가 된 <클로비스 2세의 아들들>은 바다 건너 호주로 팔려나갔다. <그라들롱의 탈출>은 프랑스의 국가 미술작품위원회가 뽑는 우수작 심사 명단에 올랐다. 국가는 당시 일반 시민 기준으로 몇 년 치의 연봉을 내고 이를 사들였다고 한다. 뤼미네는 여러모로 성공한 화가였다.

‘기회주의자’ 비판도 받았다

에바레스트 비탈 뤼미네, 과부, 1865, 캔버스에 유채, 91x104.5cm,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레스트 비탈 뤼미네, 과부, 1865, 캔버스에 유채, 91x104.5cm,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물론, 뤼미네의 이러한 예술 행보를 놓고 ‘기회주의자’라는 식의 지적도 나왔다.

아카데미 입맛을 맞추기 위해 고증을 포기하고,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묘사를 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하지만, 뤼미네만큼 실력과 수완 모두 좋은 예술가가 당시 흔치 않았던 점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울러 뤼미네는 때때로 <과부>와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뱃일을 하고선 돌아오지는 못한, 오직 남편의 흔적만 남긴 배를 등진 채 눈물짓는 시골 여인의 모습이다. 가난한 어민의 애환은 서글픈 표정과 구깃구깃한 옷, 탁한 색채와 황량한 대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는 신화화나 역사화, 풍속화로 볼 수 없었다. 당시로는 아방가르드 영역에 가까웠던, 일종의 사실주의 화풍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즉, 그는 이런 작품도 만들 수는 있었다. 단지 이와는 다른 방향의 길을 택했을 뿐.

뤼미네는 살면서 두 번의 결혼을 했다. 첫째 부인 사이에선 딸을 안았다. 그녀가 죽은 후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여인과 재혼했다. 그는 여성에게도 그림을 가르친 그 시절 몇 안 되는 아카데미 화가이기도 했다.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결투가 끝난 후, 연대미상, 캔버스에 유채, 175x130.5cm [Christie‘s via ARCADJA aucti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에바리스트 비탈 뤼미네, 결투가 끝난 후, 연대미상, 캔버스에 유채, 175x130.5cm [Christie‘s via ARCADJA auction,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는 생의 말년에도 파리 상품거래소 돔 내부의 대형 벽화 사업에 참여할 만큼 이름값을 유지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딴 적도 있었다. 뤼미네는 40년 넘는 세월간 파리의 작업실과 중서부 브렌 내 별장을 오가며 살았다. 뤼미네는 1896년 파리에서 죽었다. 향년 일흔다섯. 몸을 눕힌 곳은 두아디크의 작은 묘지였다.

모든 화가가 시대에 맞서지는 않았다. 어떤 화가는 시대를 받아들이고, 시대가 원하는 상을 극치의 영역에 올리기도 했다. 예술은 그런 화가도 필요로 했다. 어쨌건, 예술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예술이었다. 예술에 대한 진리 중 하나는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절대 다수는 그저 거듭 평가에 재평가를 받고, 끝없이 해석에 재해석을 당할 뿐. 마치, 뤼미네의 그림처럼.

참고자료

Francoise Daum, Dominique Dussol et al., Evariste Vital Luminais, Peintre des Gaules., Exhibition catalogue, Carcassonne: Musse des beaux-arts; Charleville-Mezieres: Musee de l‘Ardenne

Musee des Beaux-Arts de Rouen

“약혼자는 내가 죽였다”…그런 악마에 빗대 자신을 그린 화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미하일 브루벨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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