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상당수 피해자는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계약을 통해 대위변제를 받았거나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손해가 공사에 전가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공사 또한 경매 조치에 참가해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9부(부장 이성복)는 12일 이른바 ‘세모녀 전세사기’의 주범 김모(59)씨에게 이같이 말하며 감형했다. 김 씨는 수백여건의 전세사기 행각으로 총 3개의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징역 10년, 징역 15년, 징역 6개월을 받았다. 총 25년 6개월이다.
하지만 항소심에 이르러 크게 감형됐다. 딸들과 함께 기소된 건은 징역 15년에서 10년으로, 추가로 기소된 2건은 병합해 심리해 총 징역 10년 6개월에서 5년으로 깎였다. 총 15년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변제, 전세사기 빌라를 떠안은 피해자들의 경매 참여 등으로 ‘피해 회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첫번째 사건 1심 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기절하기도 했던 김 씨는, 항소심 선고가 끝나자 심호흡을 하며 들어갔다.
징역 25년 6개월→15년 이유가
‘세모녀 전세사기 사건’은 대규모 전세사기의 물꼬를 튼 사건이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던 시기 무자본 갭투자가 횡행하면서 조직적 범죄가 퍼졌고 2022년 말부터 세모녀 전세사기, 빌라왕, 인천 건축왕 등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김 씨는 2017년부터 30대인 두 딸의 명으로 서울 강석, 관악구 등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 500여채를 ‘무자본 갭투자’했다. 신축 빌라 분양대행업자와 공모해 임차인을 모집했다. 이들은 분양 대금보다 전세 보증금을 비싸게 받아 일부를 리베이트로 취하는 방식으로 무자본 갭투자를 이어나갔다. 기소된 3개 사건을 합하면 피해를 본 세입자는 355명, 피해 액수는 795억원에 달했다.
2023년 7월, 첫 번째 사건 1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징역 10년. 2024년 6월, 딸들과 함께 기소된 사건의 1심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징역 15년. 사기죄 법정 최고형이었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6단독 최민혜 판사는 “전세 사기 범행은 주택임대차 거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위의 2개 사건과 추가 기소건을 병합해 심리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 씨와 일당이 ‘전세사기’를 저지른 점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수백채의 빌라를 동시진행 방식으로 매수해 피해자들이 전세 보증금을 정상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침해됐다.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피해자들은 같은 조건으로 임대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동시진행 관여자 중 누구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 피해자를 기망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양형에 대해서는 다르게 판단했다. ‘실질적’인 피해액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상당수 피해자는 HUG 보증계약을 통해 공사로부터 대위변제를 받았거나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렇지 않은 피해자들은 선순위 임차인으로서 임대차 목적의 경매 또는 처분을 통해 어느 정도 피해 회복이 가능한 구조”라고 했다.
HUG는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 집주인 대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지급한다. 이후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이를 회수할 수 있다. HUG가 잠시 떠안는 구조다. 피해 빌라가 제 가격에 매매·처분되지 않으면 HUG의 손실이 된다.
항소심 재판부는 “공사가 대위 변제한 경우 손해가 전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경매 조치에 참가해서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피해 회복이 피고인들의 노력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피해자들의 임대차 보증금 상당의 경제적 손해가 회복됐다는 점은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전세사기 잇따른 감형…건축왕 15년→7년
전세사기에 대한 감형은 처음이 아니다. 앞서 ‘인천 건축왕’ 사건도 1심 징역 15년에서 2심 징역 7년으로 감형됐다. 인천 건축왕 사건 피해자들은 무려 4명이나 자살했다.
인천 건축왕으로 불리는 남모(62)씨는 건축업자다. 대출을 받아 빌라를 세우고 거기서 거둬들인 보증금에 대출을 더해 다시 빌라를 세우는 방식으로 2700채가 넘는 빌라를 차명으로 소유했다. 빌라 소유주는 ‘바지 사장’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기 액수 148억원 중 절반이 되지 않는 68억원만 ‘사기’ 혐의로 인정했다. 건축회사의 재정 악화 상항을 인지한 2022년 1월 이후에 받거나 올린 보증금만 사기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신규 계약은 보증금 전액을, 증액 계약은 증액된 금액만큼을 편취금액으로 인정했다”며 “해당 시점 이후 같은 금액의 보증금으로 임대차계약을 갱신한 경우는 보증금 수수 행위가 없어 범죄사실 증명이 없는 것으로 처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인천 건축왕 사건은 대법원에 상고돼 심리가 진행되고 있다. 남 씨는 388억 상당의 다른 전세사기 혐의에 대해서도 별도로 재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