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전히 찬란하게’ 송일곤 감독 인터뷰
데뷔 65년 맞은 김혜자, 9년만의 스크린 복귀
일본군 ‘위안부’ 소재, 비극 이전 시간에 초점
“두 소녀 찬란했던 시간 보며 마음 전해지길”
1942년, 내일의 일상이 어떻게 저물지 모르던 시린 겨울. 산정(山頂)에 오른 정임(최주은 분)이 고운 목소리로 한 음 한 음 디디듯 노래를 이어 간다. 그 곁엔 단짝의 재능을 제 것인 양 아끼는 순옥(박서경 분)이 있다. 열일곱 소녀들의 뺨엔 이내 옅은 봄이 번진다. 언젠가 서울로 가 한 사람은 가수가, 한 사람은 친구를 무대에 세우는 단장이 되리라. 참혹한 시대에도 끝내 스러지지 않은 희망의 떨림이다.
카메라는 그 얼굴들에 오래 머문다. 해사했던 얼굴 위로 깊은 주름이 내려앉고, 영화는 세 개의 시간을 오간다. 그 끝자락 어딘가에서 소녀의 얼굴은 노년의 순옥(김혜자 분)에게 가 닿는다.
21일 개봉한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루지만, 위안소는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시선이 닿는 곳은 ‘비극 이전’의 시간이다. 비극이 앗아간 것은 목숨과 자유만이 아니라 평범하고도 찬란했던 한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위안부 이야기이기에 진입 장벽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픈 이야기니까 아프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보고 싶지 않잖아요. 아픈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이미 있었기에, 굳이 그 이야기를 재연해서는 안 된다고 봤어요.”
영화는 1999년 단편 ‘소풍’으로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심사위원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이 긴 공백기 끝에 내놓은 이야기이자, 데뷔 65주년을 맞은 김혜자가 ‘길’(2017) 이후 9년 만에 선택한 스크린 복귀작이다. 22일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만난 송일곤 감독은 “두 소녀의 찬란했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아픔과 마주하게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영화의 씨앗이 된 건 이혜숙 작가의 희곡 ‘오래된 사과’다.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를 손수 써 온 송 감독이 다른 작가의 이야기로 메가폰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송 감독은 고통의 시간을 되풀이해 보여주는 대신, 사건의 앞과 뒤에 카메라를 비췄다.
소녀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은 위안소로 끌려갔던 순옥의 사촌 언니 점례가 등장하면서다. 넋이 나간 채 마을로 돌아온 점례의 얼굴은 화면 밖의 참상을 짐작게 하고, 소녀들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예고한다. 송 감독은 “그 일을 겪고 돌아온 여성이 있다면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며 “사건의 통증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으로 전해지길 바랐다”고 들려줬다.
그들의 공포는 소리로 빚어진다. 소녀들이 숨은 화장막에 일본군이 들어서는 순간, 음악은 숨을 죽이고, 화면은 긴박한 기척들로 채워진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정임과 순옥. 떨어지는 낫을 소녀의 손이 가까스로 붙드는 찰나, 객석의 숨도 함께 멎는다.
송 감독은 “영화를 좀 더 장르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배치했다”며 “영화를 대상화하거나 거리를 둔 채 메시지를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관객은 폭력을 구경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소녀들 곁에 나란히 웅크릴 수 있었다.
“아이들이 무서울 땐 같이 무서워하고, 행복할 땐 같이 행복하길 바랐어요. ‘이 아이들이 잡혀가지 않았으면, 무사했으면’ 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했죠.”
공포가 지나간 자리에도 소녀들은 노래한다. 송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것은 ‘핍진성(逼眞性)’이었다. 관객이 실제처럼 믿게 되는 힘이다. 송 감독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절에도 아이들은 꿈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게 가슴 아프기를 바랐다”고 했다. 뮤지컬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아이들이 지금 태어났다면,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블랙핑크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장면은 판타지가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세 시간을 잇는 건 얼굴이다. 송 감독은 이 영화를 ‘인물화’라고 했다. 그는 “인물화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감정과 기억이 보인다”며 “풍경 대신 얼굴로 그들의 감정을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이들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 얼굴들의 한가운데에 김혜자가 있다. 마지막 드라마를 끝내고 “들꽃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다”던 배우는 젊은 세대가 꼭 봐야 할 이야기라는 감독의 오랜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선생님이 엔딩에서 ‘하루하루는 지독시리도 안 가는데, 10년 20년은 금방 지나가’라는 대사를 하는 클로즈업 장면이 있어요. 찍는 내내 전율이 왔어요. 대배우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얼굴이었죠.”
노래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꿰고, 기억은 노랫말처럼 입에서 입으로 건너간다. 영화 제목에도 그 마음이 담겼다. 송 감독은 “‘여전히’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단어”라며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는 사라진다. 기억해야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아이들의 찬란했던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해야만 과거의 아픈 이야기도 기억할 수 있다고 내내 생각했어요. 그 시절을 기억해야 우리는 다시 비극을 맞지 않을 수 있고, 비극 앞에 서더라도 연대하고 공감하면 그 상처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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