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퇴직연금 강화 방안 발표
2028년 1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행
기금형도 도입…IRP 투자대상 다양화
경영계 “영세기업 부담, 단계적 시행을”
기금형 퇴직연금 민간 금융사 참여 확대
영세 사업장 대상 적립금 매칭·융자지원
미도입 사업장 ‘푸른씨앗’ 자동가입 추진
정부가 2030년까지 모든 사업장에 퇴직급여 사외적립을 의무화한다. 퇴직금을 회사 내부에 쌓아두는 대신 외부 금융기관에 적립하도록 해 기업 도산이나 경영 악화에 따른 퇴직금 체불을 막겠다는 취지다. ▶관련기사 3면
영세 사업장의 도입 부담을 덜기 위해 적립금 매칭 지원과 경영자금 융자비용 보전도 함께 추진한다. 또한 퇴직연금 중도인출 대신 담보대출을 활용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기금형 퇴직연금의 민간 금융회사 참여를 확대한다.
고용노동부와 재정경제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은 29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와 당정협의를 거쳐 이 같은 내용의 ‘퇴직연금 기능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방안은 지난 2월 6일 노사정 공동선언에서 제시한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 방향을 구체화한 것이다.
정부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28년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를 시행할 계획이다. 2028년 1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2029년 10~99인 사업장, 2030년 1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한다. 퇴직급여 사외적립은 근로자가 퇴직할 때 지급해야 할 돈을 기업이 미리 외부 금융기관에 쌓아두는 방식이다. 기업이 경영난에 빠지거나 도산하면 퇴직금 지급이 어려워질 수 있는 사내 적립 방식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지난해 전체 임금체불액 가운데 퇴직금 체불액은 8229억원으로 41.1%를 차지했다.
영세 사업장이 퇴직연금을 먼저 도입하도록 유도하고 저임금 노동자의 퇴직급여 적립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 지원도 마련한다. 사외적립을 조기에 도입하는 중소기업에는 최저임금의 130% 미만을 받는 근로자의 부담금 10%를 지원한다. 퇴직연금을 새로 도입하는 중소기업에는 경영자금 융자 시 대출금리를 2%포인트 지원한다. 조기 도입 사업장에 재정지원 60억원과 경영자금 융자비용 보전 사업 62억원 지원은 2027년 고용노동부 예산안에 반영됐다.
정부는 퇴직연금 미도입 사업장 15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를 토대로 3년간의 단계적 도입 기간과 지원책을 마련했다. 사외적립을 완료하지 않은 사업장은 공적 기금형 퇴직연금인 ‘푸른씨앗’에 자동 가입하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정기감독을 확대하고 필요하면 과태료 부과 등 제재도 강화할 계획이다.
전문기관에 적립금을 맡기는 만큼 운용 성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수탁법인의 책임이다. 정부는 법률에 가입자 이익 최우선 원칙을 명시하고, 의무를 위반한 경우 수탁법인의 손해배상 책임과 가입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규정할 계획이다.
운영상 사고나 손실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마련한다. 수탁법인은 운영위험준비금을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하며, 정부 방안은 적립금의 0.25% 수준을 제시했다. 준비금은 가입자 손실 보전과 사고 대응·복구에 활용하고 별도 계정으로 관리하도록 할 계획이다. 자산보관과 기준가 산출, 운용성과 평가 등 교차검증이 필요한 업무는 외부에 의무 위탁하도록 해 내부의 판단과 독립적인 검증이 이뤄지도록 한다. 반면 투자정책 결정이나 위험관리, 위탁기관 선정·관리 등 핵심 업무는 수탁법인이 직접 책임지도록 한다.
퇴직연금이 노후자금으로 쓰이도록 수령 방식도 바꾼다. 현재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중도인출하거나 퇴직 시 일시금으로 받는 사례가 많아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제도의 취지가 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정부는 주택 구입이나 생활자금 등 목돈이 필요한 가입자가 퇴직연금을 깨지 않고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담보대출 상품 출시를 위한 법·제도 개선을 추진한다.
퇴직급여를 받을 때 일시금 수령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안도 도입할 계획이다. 연금과 일시금 수령에 따른 예상 수령액과 세금 등 관련 정보를 사전에 제공해 합리적인 선택을 돕는다.
장기 연금 수령에 대한 세제 지원도 확대한다. 청년층의 퇴직연금 납입액에는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15%의 세액공제율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퇴직연금이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소득을 뒷받침하는 다층적 연금 체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퇴직연금 운용 성과를 높이기 위한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 방안도 추진한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전문성을 가진 제3자(수탁법인)가 적립금을 대신 운용하고 수익과 손실은 가입자에게 귀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퇴직연금이 원리금 보장상품에 지나치게 편중돼 장기 수익률이 2%대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연금 운용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민주당 소속인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김정호 위원장은 “(노사정이) 퇴직급여 단계적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에 뜻을 모았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성과”라며 “이제는 구체적인 제도 개선과 입법 성과로 이어 나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 계약형에서는 사업주가 금융기관과 계약을 맺고, 확정기여형(DC형)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운용 상품을 직접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금형에서는 전문 운용기관에 적립금 운용을 맡길 수 있어 상품 선택과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가입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다만 실제 수익률은 운용 전략과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정부는 기금형을 설립 주체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했다. 금융회사가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하는 ‘금융기관 개방형’, 복수의 사용자나 노사단체가 연합해 설립하는 ‘연합형’,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공공기관 개방형’이다. 사업장별로 계약형과 기금형을 함께 설정하거나 복수의 기금형을 두는 것도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근로자대표의 동의를 거쳐 특정 기금형을 기본 선택지로 설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기금 운용기관은 엄격한 인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노사·전문가·정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인가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예비인가와 본인가의 2단계 절차를 적용할 계획이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금형 퇴직연금의 수탁법인 설립 주체를 세 가지로 유형화하고 각 특성에 맞게 설계했다”며 “적립금은 노동자의 노후 돈인 만큼 수급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엄격한 수탁자 책임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 사업자 47곳에 대한 평가도 수익률 중심의 정량 평가로 바꾼다. 장기 운용 성과와 연금 수령 실적 등을 평가하고 사업자별 수익률 공개를 확대해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구상이다. 운용 성과가 좋은 사업자가 더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도록 유도해 금융회사 간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70%로 제한된 IRP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도 단계적으로 완화한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투자 선택권을 확대하고 장기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만기 이후 자금이 방치되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의 적용 예정 통보 시점도 기존 만기 4주 후에서 만기 2주 전으로 앞당긴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전년보다 69조7000억원 증가했다.
그러나 지난해 수익률은 6.47%에 그쳤다. 2024년 퇴직연금 중도해지 금액은 15조원, 중도인출액은 3조원에 달했다. 지난해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수령한 계좌는 전체의 16.5%에 불과했고, 83.5%는 일시금으로 받았다.
정부는 관련 내용을 반영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을 다음 달 중 마련해 연내 국회 통과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태형 기자
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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