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지시가 있었느냐 외에 하급자 실행행위 위법 여부도 따져야
‘일선 판사 동향 파악 지시’ 범행구조 비슷한 사법농단 사건 영향
[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 김기춘(81)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대법원이 직권남용죄 성립 여부를 엄격히 따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특정 성향의 판사 뒷조사를 지시하는 등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김전 실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게 적용된 14개의 범죄 행위 중 대부분의 행위에 대해선 직권남용을 인정하면서도 2개 행위에 대해서는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지 다시 살피라고 했다.
재판부는 “공무원 또는 유관기관 임직원이 직무수행 과정에서 따라야 하는 원칙,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법령상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한 때’ 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해 부당한 지시’를 했더라도, 이에 따라 하급자가 행한 일이 실제 ‘의무에 없는 위법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죄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소된 범죄 구조가 비슷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은 무죄를 다퉈볼 여지가 생겼다. 양 전 대법원장의 주요 혐의에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해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대법원이 구체화 한 법리에 따르면 양 전 원장이 심의관에게 지시한 40여개의 직권남용적 지시 중 실제 실행에 옮겨진 심의관들의 보고서 작성 행위 등이 법령이나 내부 규정에 어긋난 것인지 일일히 따져봐야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친다. 조 전 장관은 청와대 민정수석 재임 중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의 감찰을 무마했다는 직권남용 혐의를 받는다. 만약 조 전 장관이 정권의 안위나 유 전 부시장을 봐주기 위한 지시를 했다면 조 전 장관 입장에서는 권한을 남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이나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이 이 지시에 따라 감찰을 중단한 게 법을 어긴 것인지를 별도로 따져야 하는 요건이 생겼다.
대법원 관계자는 “최근 선고가 있었던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처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 있어 상급자는 직권을 남용했어도 하급자가 수행한 일이 의무에 없는 일이 아니라면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게 기본 법리”라며 “이번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선고는 이 중 하급자가 수행한 의무에 없는 일에 대한 판단을 기존의 법령과 내규 등에 비춰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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