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상속·증여세법 개정 저지…“초부자 감세”
25년간 유지된 세율에 ‘노노(老老)상속’ 가속화
‘경제 저성장’ 부추기는 부의 고령화는 외면
공제액 2배 높은 일본도 ‘부의 이전’ 활성화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노인이 노인에게 자산을 물려주는 나라’ 고령화로 대한민국의 부(富)가 늙어가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정작 투자나 소비의지가 있는 젊은이들은 모아놓은 돈이 없어 제약이 크고, 경제 활동 반경이 좁은 50대 이상 세대가 8090세대 부모로부터 갑자기 자산을 물려받아 쌓아두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 한국 경제의 ‘1%대 저성장’이 경고된 가운데, 지갑을 열고 내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산의 이전을 보다 쉽게 터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적 움직임에 거대 야당이 제동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상속세 감면을 최고 50%로 끌어올리자는 정책적 변화를 ‘초부자 감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노노(老老)상속은 이미 새 질서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80대 이상 노인이 물려준 상속 재산만 20조원을 넘겼다.
경제의 허리인 3040세대의 중산층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민생 곳곳에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려면, ‘부의 이전’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초부자 감세’라는 편향된 정치적 프레임에 갇힌 상속·증여세를 내수 활성화를 위한 중산층의 민생 문제로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부의 이전’ 제동…경제 활력도 비관 전망
2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가 제출한 세법개정안 중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속증여세법)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세법개정안 주요 내용은 현행 최고 상속·증여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자녀공제를 현행(10년간 5000만원) 10배 수준인 5억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이다. ‘초부자 감세’의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의 부결 방침으로 세법개정안 통과가 어려워지면서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세법 개정을 ‘부자 감세’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노노(老老)상속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증여 부담으로 사망 이전 부의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노인에서 노인으로만 자산이 이전되며 경제 전반에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상속세가 부과된 피상속인이 80세 이상인 경우는 1만712건으로 전체 상속 건수의 53.7%에 달했다. 이들이 물려준 재산은 총 20조3200억원으로 1년 만에 3조9100억원가량 늘었다. 이는 2018년(6조6100억원)과 비교해 3배 가량 늘어난 수치다. 80대 이상 노인의 상속 재산은 자녀 세대인 5060에 이전되는 경우가 다수다. 5년 만에 노노(老老)상속 3배가 넘는 규모로 늘어났다는 얘기다.
이같은 현상은 향후 더 강화될 전망이다. 헤럴드경제가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3년 말 기준 전체 가계 자산 중 5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26.7%, 60대는 24.7%로 30세 미만(1%), 30대(10%), 40대(21.6%)에 비해 높다. 부동산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역시 50대(26.4%), 60대(25.9%)가 과반을 차지하며, 70대 이상(18.8%) 보다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부의 절반 이상을 틀어쥔 5060세대가 지금처럼 사전 증여도 없이 노인 연령에 진입할 경우, 부의 고령화 현상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부의 이전 없이 자녀 세대의 부가 증식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현재 5060은 고성장 시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을 통해 자산을 키워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대 문턱에 접어들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구도 지속 감소하며 장기적인 ‘저성장’ 전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높은 세금 문턱이 유지되며 자산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 향후 경제 활력이 더 감소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안경봉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경제 활력의 측면에서 볼 때, 노인들은 젊은층에 비해 소비가 적고 자산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투자나 소비 의지가 있는 젊은층에 자산이 이전돼야 경제 전반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아파트만 물려줘도 ‘부자’ 프레임
최고세율(10억원 이상 50%) 감면이 ‘부자 감세’ 시각에 대해서도 과도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 11월 서울 아파트 평균 거래금액은 10억7826억원으로 집계됐다. 중위 매매가격 또한 1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지난해 말 기준 5060 세대 자산 대부분은 60% 이상은 부동산으로 구성돼 있다. 선택지가 부동산 증여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파트 한 채를 물려주고자 해도 최고세율을 적용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얘기다.
또 한국의 상속·증여세 문턱은 해외 선진국들에 비해 현저히 높다. 현행 우리나라에서는 자녀에게 10년간 최대 5000만원(미성년자 2000만원)의 공제 한도가 적용되고 있다. 1997년 이후 변화가 없었던 공제금액은 지난 2015년 3000만원에서 2000만원 늘었을 뿐이다. 반면 미국의 유산세와 증여세 공제 한도(1361만달러·190억원)는 1997년 기준 60만달러(8억4000만원)에서 2200%가량 늘었다.
심지어 OECD 국가 중 상속·증여세율 1위(55%)에 해당하는 일본에서도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며 부의 이전을 촉진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높은 자산 이전 문턱이 저성장을 부추길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도래한 결과다. 일본의 10년 증여 공제액은 한국보다 2배가량 높은 1100만엔(한화 약 1억250만원)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속세 부과 가능성을 높여, 사전증여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지속 추진하고 있다.
고윤성 한국외대 경영대학 교수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부를 쥐고 있는 연령층이 더 높아지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도 계속 자산 이전을 도와주는 정책을 추진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어 “경제선순환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증여재산 공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