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국내 정치인이나 관료, 기업인을 망라해 지난 11월 미 대선 이후 트럼프 당선인과 만남이 확인된 사람은 정 회장이 유일하다. 23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128개국 세계상공회의소 회장과 116개국 주한 외국 대사에 “최근 일련의 어려움에도 한국 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근로자의 휴가 사용 촉진과 송년·신년회의 차질없는 진행, 우리 농축수산물 구매 등의 내용을 담은 ‘내수 활성화를 위한 권고문’을 회원사에 송부했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한 국정 공백 속에서 기업들이 외교에서 대외신뢰도 복원, 내수 소비 촉진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할 일을 대신 떠맡아 하고 있는 양상이다.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준엄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비상경영체제 구축과 내년 기업 살림살이 계획을 짜기도 여력이 없는 기업들이다.
대통령과 일부 군인이 망가뜨려 세계에 망신을 산 민주주의 시스템은 국민이 스스로 복원하자고 나섰고, 정부와 국회가 손을 놓은 국정은 민간기업들이 공백을 메꾸겠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시민과 기업의 저력과 자발성은 위대하나, 나라꼴과 정치권의 행태는 한심하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로 직무정지된 마당에도 여야는 당리당략에 매몰돼 공동의 국정협의체마저 구성하지 못하고 남탓만 하고 있다.
정상적인 정부와 국회라면 지금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이 가져올 국제 경제·정치 환경 변화에 총력 대응해야 할 때다. 이미 각국은 미 차기 행정부를 이끌 인사들과의 접촉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일본은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인 아베 아키에 여사가 트럼프 당선인을 만났다. 트럼프 당선인의 대선 승리 후 첫 기자회견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이 동석해 1000억달러(144조원) 규모의 대미투자계획을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취임 전이라도 만날 수 있다는 말로 화답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미 지난달 플로리다를 방문해 트럼프 당선인과 관세 문제를 논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7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에 트럼프 당선인을 초청해 대면했다. 우리는 윤 대통령이 미 대선 직후인 지난달 7일 트럼프 당선인과 통화한 게 전부다.
정 회장이 개인적 인연까지 동원해 트럼프측과 ‘끈’이라도 살려 놓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정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 초청으로 지난 16일부터 5박 6일간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5박 6일간 체류했다. 정 회장은 이곳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도 인사했다고 한다. 최 대한상의 회장은 국제사회와 글로벌 시장의 불안과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최 회장은 서한에서 “높은 회복 탄력성과 안정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국은) 당면한 어려움을 빠르게 극복해 낼 것”이라며 “대한상의는 기업과 함께 정부와 협력해 철저한 준비를 통해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제인 행사를 아시아태평양 국가와 기업인의 번영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최 회장은 내년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2025 APEC CEO 서밋’ 의장을 맡고 있다.
정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도 기업들이 위기와 비상인 판이다. 삼성전자는 해외 법인 총괄 9명을 전원 소집해 지난 17~19일 글로벌 전략회의를 열었다. 트럼프 2기의 환율·관세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최근 글로벌 권역본부장회의를 개최했고, LG전자도 전사 확대경영회의를 열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야는 23일까지도 국정협의체조차 합의를 못했다. 여당은 원내대표급으로, 야당은 당대표급으로 하자며 싸우고 있다.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두고도 더불어민주당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를 향해 24일까지 공포하지 않으면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조기 대선을 위한 국정 마비 획책이라며 한 권한대행에 재의요구권 건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야당은 조기대선에, 여당은 대통령 탄핵 지연에 매달리고 있으니 트럼프2기 대비와 규제혁신, 기업지원은 언감생심이다. 당장 급한 반도체특별법, 인공지능(AI)기본법, 전력망특별법 등부터 뒷전으로 밀렸다.
정부와 국회, 정치가 민생을 보살피고 기업을 밀어주진 못할 망정 발목을 잡고 있어서야 되겠나. 기업의 고군분투를 그냥 구경만 할 셈인가. 내년 성장률 전망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고, 수출·내수의 경고음은 갈수록 커져간다. 여야와 정부는 당장 할 일을 하라.
이형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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