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얀 마테이코
옛 전설적 광대 ‘스탄치크’ 소환
우스꽝스러운 모습뒤 현인 모습
이를 페르소나로 조국 상황 경고
“늘 깨어있어라” 전하려는 교훈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왕에게도 ‘뼈 있는’ 농담한 광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전하. 저와 내기하시겠습니까?
16세기 폴란드 왕국의 궁정 광대 스탄치크가 왕 지그문트 1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지그문트 1세가 되물었다. “왕국에서 가장 흔한 직업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마… 농부이지 않겠는가?” 스탄치크의 물음에 왕이 대답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스탄치크가 말했다. “정답은 의사입니다.” 스탄치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의 왕 앞에서 천을 꺼내쥐었다. 이를 얼굴에 두르곤, 치통을 앓는 척 뺨을 어루만졌다. “잘 보십시오.” 그는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마주하는 모든 이가 그 앞에서 젠체하며 치료법을 가르쳤다. “전하. 어떻습니까.” 스탄치크가 킬킬거렸다. “이곳, 궁 안에서부터도 의사가 이렇게나 많습니다.” 이 너스레에 지그문트 1세 또한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스탄치크의 말에는 속뜻이 있었다.
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인간이 궁정에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능한 관리를 솎아내 내쫓아야 한다는 경고였다.
사실, 스탄치크는 이런 자였다. 겉보기에는 웃긴 옷을 입고 이상한 표정이나 짓는 익살꾼 같았다. 실은 갈고닦은 문장과 행동 하나하나에 해석 여지를 두는, 누구보다도 나라 안팎 정세에 훤한 현인의 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궁정의 모든 사안을 우스꽝스러운 풍자로 승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그랬는데….
서신에는 충격적 내용이 있었다
그런 스탄치크조차 이날만큼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 마주한 일은, 그 어떠한 우스갯소리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참담하기에 그랬다. 이미 웃길 채비는 마쳤다. 뿔과 귀가 비죽 튀어나온 모자를 썼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옷도 입었다. 모든 천은 눈에 띄는 빨강으로 맞추고, 마지막으로 붉은색 구두에 양말까지 신었다. 그러니까, 이제 무도회로 나가 왕족들 앞에 서면 될 일이었다. 늘 그랬듯 실없는 척 일침을 가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 탁자 위 서신 때문에.
그가 펼쳐본 종이에는 결코 반길 수 없는 소식이 쓰여 있었다.
궁정 풍경, ‘함락’보다 더 속 쓰렸다
1507년께, 스탄치크가 궁정 광대로 있는 시기.
지그문트 1세의 폴란드 왕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같은 편에 선 채 전쟁을 선포했다. 상대는 바실리 3세의 모스크바 대공국이었다. 이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뜯어먹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일대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연합군의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바실리 3세 측이 먼저 화친을 제안해야 할 만큼 주도권을 잡을 때도 있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던 1514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흐름을 쥐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상대 연합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땅을 골라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곳이 스몰렌스크(Smolensk)였다. 이 땅은 연합군과 모스크바 대공국, 나아가 유럽 대륙과 러시아 영토를 잇는 관문 격이었다. 이 일대 말곤 사방이 강과 늪지였던 만큼 더더욱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받는 지역이었다. 그해 7월31일. 모스크바 대공국은 포까지 긁어모아 압박을 거듭한 결과 함락에 성공했다. “(…) 바실리 3세가 직접 몰고 온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세를 꺾을 수 없었기에, 결국 스몰렌스크 총독이 요새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스탄치크 앞에 놓인 종이에는 이런 식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탄치크는 알 수 있었다. 그곳이 뚫렸다는 건, 사실상 전선 전체가 위험에 처했다는 뜻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이런 가운데, 더 절망스러운 건 지금 궁정의 분위기였으리라.
누군가는 분명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슬퍼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당장의 술과 파티, 춤과 노래를 즐길 뿐이다. “다들 제정신인가?” 이런 혼잣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다.
그래. 우리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패한 건 속이 쓰리지만, 곧이어 벌어진 오르샤 전투에선 대승을 거뒀으니 사실상 동점이지 않은가.
혹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예 틀린 말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스몰렌스크 성벽이 무너지고 한 달여가 흐른 9월8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과 모스크바 대공국은 오르샤에서 또 한 번 싸웠다. 이번에는 승리했다. 3만여명 대 4만5000여명이라는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도 상대를 제압했다(정확한 전투 규모를 놓고는 아직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연합군도 힘이 빠졌다. 애초 목표였던 스몰렌스크 탈환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러면 이겨도 이겼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연합군이 기진맥진해진 사이 모스크바 대공국은 스몰렌스크의 성벽을 더 높게 쌓을 터였다. 그 나라 국민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고, 핵심 군대까지 주둔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의 옛 요새는 곧 모스크바 대공국의 가장 든든한 방패가 돼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진짜 우스꽝스러운 광대는 누구인가?
실제로 러시아 진영(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은 1611년까지 스몰렌스크의 실질적 통치권을 쥘 수 있었다.
점령 후 근 100년에 가까운 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림 속에서는 광대 스탄치크만이 이러한 흐름을 어렴풋하게나마 예측하고 있다.
스탄치크는 현 상황이 갑갑하다. 지팡이는 내던졌다. 광대로의 마지막 의욕을 잃은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른 듯 신 아래 카펫은 구겨져 있다. 창밖으로는 폴란드 왕국의 대관식 장소인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이 보인다. 그 옆으로 떨어지는 건 혜성이다. 이는 추락의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첨탑 왼쪽 별은 오리온자리의 일부로 통한다. 오리온이 누구인가. “나는 어떤 짐승도 잡을 수 있다”고 오만을 부리다 전갈 독에 쏘여 죽은 신화 속 사냥꾼이지 않은가. 이 별자리는 스탄치크를 대신해 관리들의 무능함을 저격하는 듯하다. 커튼 밖 궁정 무도회는 화기애애하다. 차려입은 남녀는 바짝 붙은 채 담소를 나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진짜 우스꽝스러운 피에로는 누구인가. 19세기 폴란드 화가 얀 마테이코의 1862년 작품, <스탄치크>다. 또 다른 제목은 <스몰렌스크 상실의 직면, 보나 왕비 궁정의 무도회에 있는 스탄치크>였다.
광대를 재소환한 이유
마테이코가 자기 시대에서 굳이 3세기 전 상황까지 끌어와 <스탄치크>를 그린 것.
금싸라기땅의 함락, 이후 탈환 실패로 이어진 급박했던 역사를 대중에게 가르치려는 차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기록을 뒤적이던 중 그때 그 시절에 새삼 몰입했기 때문이라고도 여길 수 없었다. 그림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마테이코가 매력을 느낀 건 당시 상황 아닌 인물 자체였다. 스탄치크. 이 전설적인 광대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현 세상에 스탄치크를 재소환해 끌어들인 특별한 이유도 있었다.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든 농담으로 녹여내던 그마저도 낙담하게 만든 상황. 그런 일이 가까운 시일 내 또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이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왕국을 휩쓴 ‘대홍수’
마테이코는 1838년 도시국가 크라쿠프 자유시에서 출생했다.
1815년에 세워진 이곳은 면적 1164㎢, 인구 9만5000~14만6000명가량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한때 이 일대를 호령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어디로 갔는가. 현대 러시아의 전신 격인 모스크바 대공국과도 맞설 수 있던 그 세력은 어떻게 됐는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스몰렌스크 전투와 오르샤 전투 이후로도 거듭 진격 태세를 갖췄다. 스몰렌스크를 빼앗긴 후 흘려도 되지 않을 많은 피를 흘렸지만, 한때는 모스크바까지 점령(1610~1612)하는 등 동유럽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상을 입고 이룬 영광은 역시나 오래가지 못했다.
아래에서부터의 봉기, 이를 틈탄 러시아 진영의 습격, 나아가 당시 황금기를 지나고 있던 스웨덴의 침공 등 악재가 이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이러한 대혼란 이후 인구 3분의 1을 잃었다.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것 같다고 해 이는 지금도 ‘대홍수(Potop)’란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
힘을 잃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결국 러시아 진영과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세력(오스트리아) 주도로 땅이 쪼개지는 굴욕도 겪었다. 이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종의 괴뢰국인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는가 하면, 그의 몰락 후 영토가 재차 분할되는 치욕까지 또 겪어야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정신을 그나마 이어가고 있는 곳. 정신 차리고 보니 아담한 크라쿠프 자유시뿐이었다. 한때 인구 1100만명(1771년 기준)의 대국은, 그렇게 작고 초라한 도시국가가 돼있었다.
이 와중에 몰락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깔려 있었다.
크라쿠프 자유시는 그 이름과 달리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진영과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세력 등 세 집단의 간섭과 참견이 이어졌다. 핵심 지도층은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외려 친(親)러시아파 등 파벌을 나누며 부스러기 권력마저 갈라먹기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이런 가운데 마테이코는 1846년 그나마 남아있던 폴란드 독립파 주도의 크라쿠프 봉기,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개입과 뒤따르는 학살을 봐야 했다.
결국 그해에 크라쿠프 자유시마저 외세(外勢)에 ‘응징’ 당해 멸망하는 모습 또한 목도해야 했다. 이제 크라쿠프 자유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마지막 등불이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령에 속한, 일개 지방 수도 수준의 땅이 됐을 뿐이었다. 마테이코는 이 과정에서 독립파 측에 몸담았던 두 친형의 상황도 전해들었다. 한 명은 전장에서 숨졌으며, 나머지 한 명은 쫓기듯 망명길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마테이코는 총체적 난국인 조국의 상황이 갑갑하고, 안타깝고, 한심했을 것이다. 집안의 비극이 그 위로 포개지며 개인적 울분까지 차올랐을 터였다.
스탄치크의 얼굴, 설마…?
그러니까, <스탄치크>는 이에 따른 결과물이었으리라.
이것은 그저 역사화라고 할 수 없었다. 눈앞 상황을 파악할 힘도, 의지도 없는 동시대 고위층을 비판하기 위한 고발물이었다. 지금 당신들의 꼴이 스몰렌스크를 빼앗기고도 먹고 놀기 바쁜 저 무능한 왕족들과 다를 게 무엇이냐는 식의. 이미 당장도 그렇지만, 이대로 있다간 그때보다 더 큰 영구적 상실감에 젖으리라는 점을 알릴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화폭 속 스탄치크의 얼굴은 유독 누군가와 닮은 면을 보인다. 마테이코 본인의 얼굴이다.
그림 <스탄치크> 속 서신의 연도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숫자를 보니 실제 스몰렌스크가 함락된 1514년이 아닌 1533년이 쓰였다. 이것은 지금도 논쟁 대상이다. 이미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여러 상징과 도상을 꼼꼼하게 쓴 그이기에, 여기에도 어떠한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가령 1533년은 러시아 진영에서 뇌제(雷帝) 이반 4세가 공식 즉위한 해다. 광기가 있는 차르였지만, 그의 즉위 후 러시아 진영의 영토는 크게 팽창했다. 그렇게 얻은 땅과 인구는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압도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한다. 즉, 밑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한 조국이 이보다 더한 재앙도 맞을 수 있다는 경고가 깔렸다는 분석이다.
다만 그것은 단지 해석을 위한 해석일 뿐, 마테이코가 이 부분만큼은 단순히 실수를 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기는 한다.
<스탄치크>에서 새삼 곱씹어봐야 할 지점은 또 있다. 이 그림의 긴 제목에 ‘보나 왕비’라는 이름이 들어가있다는 게 그것이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1514년, 지그문트 1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스몰렌스크를 빼앗긴 그 해. 당시 보나 스포르차는 지그문트 1세의 왕비로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지그문트 1세와 정식 결혼한 건 4년 후인 1518년이었다. 마테이코의 고증 실패일까. 아니었다. 여기에도 의도가 있었다. 보나 스포르차는 밀라노 공국 출신이었다. 즉, 그녀는 성분만으로 따지면 외국인이었다. 그런 그녀의 이름을 굳이 등장시킨 건, 외세에 놀아나고만 있는 대다수 관리층을 저격할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외세에 기대 동포를 탄압하다
실제로 마테이코가 작업에 나선 1862년을 전후로 조국의 현실은 더욱 처참해지고 있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부활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 세력의 시위가 러시아 진영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이때 알렉산데르 비엘로폴스키라는 폴란드 귀족이 러시아 내 폴란드·리투아니아인의 통제를 맡고 있었는데, 친러시아파였던 그는 대규모 반란을 우려해 잘못된 수를 둔다. 청년 폴란드 활동가를 모아 러시아군에 강제 징집(복무 기간 20년)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또 한 번 외세를 업은 채 동포를 탄압한 셈이다.
이는 1863년 1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약 1200회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봉기군 1만~2만여명이 사망하는 일명 ‘1월 봉기’를 촉발하게 된다.
이번에도 결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의 패배였다. 폴란드어 사용 금지, 대량 이민과 시베리아로의 추방 등 참담한 결과가 따라왔다.
스탄치크, 마테이코 그림 곳곳 등장하다
단 한 점의 그림으로 끝내기에는 조국을 향한 불안과 울분을 다독일 수 없었을까.
마테이코는 이후로도 자기 화폭에 스탄치크를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마테이코는 1874년에 <지그문트 종 매달기(1521년 크라쿠프 대성당 탑에 지그문트의 종 매달기)>를 그렸다. 그림 속에서는 폴란드 왕국 왕 지그문트 1세와 왕비 보나 스포르차를 볼 수 있다. 자식과 신하, 귀족과 일꾼, 성직자와 일반 시민도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이들이 구경하는 건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앞 설치되는 12t짜리 ‘지그문트 대종(Dzwon Zygmunt)’. 종은 묵직하고, 주변 배경은 다채롭다. 이는 당시 폴란드 왕국의 위상을 상징한다.
실제로 지그문트 1세는 따지자면 명군 반열에 속하기는 했다. 그의 치세 기간 폴란드 왕국은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기술과 문화 발전을 일궜다. 스몰렌스크를 빼앗긴 건 두고두고 뼈아픈 일이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 당장 화를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이런 가운데, 스탄치크는 여기에도 있다. 귀가 달린 붉은색 모자를 또 썼다. 그는 왕과 왕비 앞에 앉아선 딴청을 피운다. 모두가 엄숙한 표정을 띄우는 그 틈에서 허벅지나 내보인 채 몸을 비튼다. “왕이시여. 조국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두는 대종이 어쩌면 애도와 장례를 알리는 조종(弔鐘) 역할만 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기회만 된다면, 이러한 특유의 조소 깃든 말장난을 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마테이코는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공작이 왕 지그문트 1세 앞 무릎을 꿇는 장면도 내놓았다.
제목은 <프로이센의 경의>, 제작 연도는 1882년이었다.
독일계인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 왕국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 그다음은 모스크바 대공국과 손을 잡고 폴란드 왕국의 속을 긁은 집단이었다. 지그문트 1세가 이에 튜튼 기사단을 정조준해 군대를 일으켰다. 공성포까지 끌어들인 후 포위와 함락을 이어갔다. 양측은 곧 합의하고 휴전을 맺었지만, 지그문트 1세는 그사이 물밑에서 벌어진 외교전에서 승기를 잡았다. 그 결과 1525년 4월10일,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는 국제적 고립 위기에 처해 꼬리를 내렸다. 무릎을 꿇고 폴란드 왕국의 신하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프로이센 공국을 세우는데, 이 또한 그때는 폴란드 왕국의 괴뢰국 격에 불과했다. 분명 그런 국가였지만 수백년이 흐른 지금, 즉 마테이코가 사는 19세기에는 어떻게 됐는가. 어느덧 독일 제국이 돼 유럽 땅의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도약했다.
그뿐인가. 당연하게도 더는 폴란드 측을 향해 무릎 꿇지 않았다. 외려 고개를 더 세운 채, 되레 폴란드인을 향한 사실상 차별과 정신 말살 정책을 행할 뿐이었다.
<프로이센의 경의> 속 스탄치크는 붉은 융단이 깔린 화려한 단상 아래 있다. 엉덩이를 깔고 앉고서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은 무릎 꿇은 저 존재가 훗날에는 우리 무릎을 꺾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건 아닐지.
민족은
어떤 상황에 있든 깨어있어야 한다.
마테이코가 그림에 스탄치크를 거듭 등장시키며 하려는 말.
이 문장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마테이코가 의도한 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작품 속 스탄치크 또한 화가의 모습을 닮은 모습이다.
‘민족은 어떤 상황이든 깨어있어야…’
이쯤 되면 짐작할 수 있듯, 마테이코는 그 시절 폴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우리 땅을 지도에서 찾기도 힘든 시기, 우리 역사와 우리 인물을 챙겨 대작으로 기록하는 고마운 예술가였다.
물론, 그림 속 특유의 인위적 구도와 냉소적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굳이 스탄치크를 끌어들인 데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스탄치크는 보통 1480년께부터 1560년께까지 폴란드 왕국에서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름과 정체성조차도 오랜 기간 논쟁 대상이었다. 왕에게 뼈 있는 농담을 하고, 이를 통해 인사와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일부 일화 또한 지어냈을 가능성이 꾸준히 나왔다. 굳이 그런 애매모호한 인물을 내세운 속뜻이 무엇이냐는 지적이었다.
다만, 조국을 향한 마테이코의 진심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실제로 마테이코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봉기군이 깃발을 든 1월 봉기 당시 재산 대부분을 이들의 군자금으로 기부했다. 기지로 무기를 직접 운반해 준 적도 있었다. 아울러 시간이 지날수록 스탄치크의 미스터리함이 작품을 더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 흐름이었다.
마테이코는 1865년 파리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1870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1872년에는 크라쿠프 미술학교 교장직을 수락했다. 이 또한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 교장직 제의를 밀어두고 받아들인 ‘민족적’ 결정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프로이센의 경의> 등 조국의 역사를 화폭에 거듭 담았다. 이 그림에 대해선 폴란드 민족에게 헌정하겠다는 뜻을 직접 보이기도 했다.
그런 한편 마테이코는 소화 궤양을 앓고 있었다. 결국 1893년 11월1일,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나이는 쉰다섯이었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최소 32개의 유럽 신문이 그의 부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유해가 머문 곳 또한 크라쿠프의 한 묘지였다.
1918년 11월11일.
지도 위 폴란드라는 이름이 다시 새겨진 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날이었다. 폴란드 쪼개기를 주도한 독일(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는 전쟁 패배, 러시아 진영은 볼셰비키 혁명 여파로 혼란을 맞고 있었다. 그 힘의 공백을 틈타 일궈낸 기적적인 부활이었다.
마테이코가 이날까지 붓을 들 수 있었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그의 페르소나인 스탄치크는 그 안에서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의외로 그리는 방식에 큰 변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탄치크는 또 한 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를 통해 재차 경고를 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이번만큼은 지금의 기쁨에 무작정 취하지 말라고. 부디, 제발, 깨어 있자고.
참고자료
김용덕, 이야기 폴란드사, HUEBOOKs
Maria Szypowska, Jan Matejko wszystkim znany, Fundacja Artibus-Wurlitzer oraz Wydawnictwo Domu Słowa Polskiego
Jozef Bachorz, Alina Kowalczykowa, Słownik literatury polskiej XIX wieku, Ossolineum
yul@heraldcorp.com
![[르포] 공장 들어서자 ‘밥 냄새’가 훅…쿠첸 ‘티타늄 밥솥’ 의 비밀[그 회사 어때?]](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10/16/news-p.v1.20260923.16e9b0f48f08469fa1014f2864f8e8fc_T1.jpg?type=h&h=240)
![장기금리와 그린스펀의 수수께끼…이번엔 뒤집혔다 [지안루카 베니그노]](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10/14/news-p.v1.20261012.37af49395c5e42388798ef9d8de6e08b_T1.jpg?type=h&h=240)
![‘미국 망하지 않으면 안전?’ 美국채 투자 인기인데…원금 지키는 투자법이 있다 [Deep Spot]](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6/10/13/news-p.v1.20260904.5dadfb5404fb467f906a01b3a4ba1592_T1.jpg?type=h&h=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