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빈필하모닉과 조성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조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시-- 시-시-시, 도-- 시-라-솔, 시-- 라-솔-파♯, 솔…”
피아노는 서두르지도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G장조, 4분의 4박자.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 나지막하게 내리 앉는 음표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이 곡은 당대의 틀을 깨부순 혁신으로 악보의 첫 마디를 시작한다.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제시하는 관습을 뒤집고, 독주자가 홀로 다섯 마디를 건넨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수없이 다섯 마디를 시작했을 조성진은 이날 이전 그 어떤 다섯 마디와도 같지 않은 서주를 들려줬다. 그건, 화려한 기교를 뽐내려는 발화가 아니었다. 곁에 선 누군가와 조심스레 걸음을 맞추듯, 함부로 나서지 않는 지극히 겸손하고 다정한 선율이었다.
평온하게 하행하던 선율이 세 번째 마디 끝자락인 ‘파♯’에 가닿아 깊은 긴장감을 빚어내는 순간, 맑은 음색은 심장의 울림이 돼 객석을 감싸 안았다. 조성진은 자칫 스치듯 가볍게 흩어질 수 있던 이 짧은 음표를 건반 깊숙이 가라앉히듯 눌렀다. 앞선 음들이 조용히 길을 내고 긴장을 머금은 마지막 파♯이 묵직하게 자국을 내자, 음악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발자국을 남겼다. 짧게 스치는 음표조차 묵직한 호흡으로 짚어낸 찰나의 일이었다. 오케스트라가 등장하기도 전 객석은 이미 베토벤에게로 향해있었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오랜만에 연미복 차림을 한 피아니스트 조성진(32)과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만남이 빚어낸 순간이다.
인연의 시작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였다. 그해 3월 예정된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빈 필하모닉 무대에 오르지 못해 급히 대체 연주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빈필의 구원투수가 된 두 사람이 야닉 네제 세갱과 피아니스트 조성진. 공연 전날 연락을 받은 조성진은 호텔 로비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한 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 첫 만남을 시작으로 2024년 빈필 내한 당시에도 조성진은 한 무대에 섰다. 당시 협연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어떤 음악은 첫 음의 소리와 질감, 속도가 곡 전체의 맥락을 만든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인상을 만든 것은 조성진의 첫 다섯 마디였다. 고요한 피아노의 독백 뒤로 벨벳 같은 빈필의 현악군이 포근하게 뒤따랐다. 음과 음 사이의 휴지가 피아노보다 좁아 도리어 첫 다섯 마디의 잔상이 연쇄를 이뤘다. 여운이 가시기 전 다시 투명한 피아노의 음색이 물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 밀도의 타건, 투명하지만 묵직한 질감을 지닌 터치는 자꾸만 청중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빈필과 조성진은 잘 맞는 짝이었다. 둘은 급하게 관계를 만들어가지 않았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고, 물러나는 순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면을 시시각각 만들며 음악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투간 소키예프는 명료한 지휘로 악단과 협연자 사이를 오갔다. 그는 조성진에게 시선을 두는 순간이 많았다. 그의 손과 눈에 시선을 두며 퍼즐처럼 들어맞고, 톱니바퀴처럼 어우러진 음악을 빚어갔다.
조성진은 피아니스트로의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베토벤이라는 큰 숲을 관장하며 함께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세계 최정상 악단이 내는 음악의 숲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소리를 낮추고 여백을 남기며 도리어 음악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음악적 절제는 오히려 능동적 선택이었다. 오케스트라와 한 판 붙어보자며 싸우기 보다 서로의 자리를 내어줘 귀 기울이게 했다. 감정을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음표를 허공의 여백 속에 수놓았고, 청중이 스스로 걸어오게 했다. 극도로 정제된 맑음과 묵직한 심장의 공명이 마음을 깊이 움직이고 쓸어내렸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음으로써 도달하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위로, 이것이 1악장이 빚어낸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카덴차에선 조성진의 기교와 구조 감각이 빛났다. 빠르게 질주하는 악구에서도 음의 윤곽은 흐려지지 않았다. 스타카토는 명료하게 튀어 놀랐고, 레가토는 유연하게 이어졌다. 아르페지오의 물결은 기교의 과시로 흩어지지 않았다. 빠른 음표들 아래 음악의 뼈대를 단단히 세웠고, 그 위에서 선율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했다. 정교하면서도 살아 숨쉬듯 생동감이 넘쳤다.
소리가 잦아드는 2악장에 접어들면 숨어있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현악기가 단호하게 밀고 나올 때 피아노는 부드럽고 절제된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는 결코 감정을 과장하거나 비애를 호소하지 않는다. 음의 길이와 무게, 프레이즈 사이의 간격을 세밀하게 조절해 음악 안에 침전한 감정을 드러낸다. 손에서 떨어진 음표들은 발자국처럼 이어졌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그는 건반 위로 음의 인장을 찍는 피아노 위의 시인이었다. 걸음마다 털어내지 못한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3악장에 이르자, 이전의 사색은 경쾌한 움직임과 재치로 전환됐다. 조성진의 손끝은 가볍고 민첩했다. 빈필은 탄력있게 그의 움직임을 떠받쳤다. 음악은 더 이상 내면의 독백이 아니었다. 서로의 반응을 눈치 빠르게 살피며 웃음을 주고받는 대화였다. 정교한 통제 속에서도 유머와 생기가 끊이지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개구진 해학을 주고받았고 맹렬하게 질주하는 와중에도 단 하나의 음표조차 뭉개지지 않는 투명한 아티큘레이션을 유지했다.
베토벤에서 꺼낸 절제와 통제는 앙코르로 선택한 쇼팽의 왈츠 두 곡에서 한층 자유로워졌다. 절묘한 강약의 대비와 루바토(표현을 위한 자유로운 시간 조절)는 음을 붙잡는 듯하면서도 놓아주고, 선율을 밀어 올렸다가도 느슨하게 풀어냈다. 조성진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베토벤으로 만든 음과 음 사이의 긴장을 풀어놓는 시간이었다.
빈필이 준비한 메인 요리는 브람스였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선곡이지만, 브람스는 유독 빈필과 각별하다. 특히 이날 들려준 2번은 1877년 12월 30일 한스 리히터가 지휘한 빈필의 연주로 세상에 처음 나왔다.
투간 소키에프는 과장된 제스처를 배제하고, 치밀한 전술로 오케스트를 직조했다. 1부에서 피아노를 포근하게 감쌌던 유려한 현악군 위로, 목관과 금관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브람스 특유의 두텁고 우울한 색채 대신, 소키에프는 투명하고 따뜻한 전원적 풍경을 그려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황금 들녘으로 관객을 데려갔다.
현악기들이 굽이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소키예프는 각 파트가 유기적인 앙상블을 이루도록 조율했다. 쇤베르크(Schoenberg)가 극찬했던 브람스의 ‘발전적 변주’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나니 음악은 이성과 감성의 팽팽한 줄다리기로 지적 쾌감을 자극했다.
완벽히 설득 당한 객석의 함성이 쏟아지자, 빈필과 소키예프는 끝나도 끝나지 않는 세 곡의 앙코르로 화답했다.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왈츠 ‘델리리엔(Delirien·황홀경)’과 ‘비행중 폴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헝가리 만세(Éljen a Magyar!) 폴카’까지. 마지막 곡이 끝난 뒤 단원들이 헝가리어로 ‘엘옌(Éljen·만세)’을 외치며 활을 들어 올리자 콘서트홀은 축제의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베토벤의 절제와 브람스의 서정이 빈의 왈츠와 폴카를 만나 경쾌한 해방을 만끽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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