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시스템, 인구 증가·기후 변화 등 복합위기
식품 대기업 지배…노동 착취·과잉 공급 야기
“현실 인식하고 음식 시민으로 거듭나야”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한 사람이 10인분도 넘는 음식을 시켜서 먹는 방송이 인기를 끌고,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셰프는 스타가 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행하는 디저트를 먹기 위해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식량이 아니라, 주효한 문화의 영역이 됐다.
그런데 음식에 대한 자극적인 탐닉이 거세질수록, 정작 그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거쳐 온 생산과 유통의 궤적은 도외시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끼니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정도로 수많은 선택권을 가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 기업들이 설계해 놓은 편리함이라는 환상 속에서 길들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대중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신간 ‘음식시민’에서 이러한 착시에 균열을 낸다. 광범위한 식량 시스템의 관점에서 음식을 바라보고, 시스템을 지배하는 권력의 구도와 그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이 어떻게 음식시민으로서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사유한다.
현재 식량 시스템은 인구 증가, 자원 부족, 생산성 정체, 기후 변화, 공급 차질 등과 맞물려 거대한 ‘복합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올여름 유럽을 덮친 40℃의 폭염과 네팔의 빙하 붕괴 참사 등 기후 변화가 부른 재난의 중심에는 전 세계 온실가스의 3분의 1을 배출하는 식량 시스템이 있다. 2022년 기준 24억명의 인구가 식량 불안정 상태를 겪고 있지만, 전 세계 비만율은 1975년 이후 오히려 3배로 증가하는 등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 책은 망가진 식량 시스템을 조속히 고쳐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해 해법을 모색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저자는 철학자 특유의 냉철함으로 현대 식문화 담론을 지배하는 극단적 주장에 반기를 든다. 유기농은 무조건 선이고 비유기농은 악이라거나, 공장식 축산의 대안은 완전한 비건뿐이라는 이분법적 서사를 경계한다. 이러한 양극화야말로 식량 문제의 해결을 요원하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유기농법으로 키우는 재료가 유기농이 아닐 수 있고, 비유기농 농법 대비 수확량이 적어 같은 수의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훨씬 더 넓은 토지가 필요하다.
저자는 음식이 생존을 위한 ‘식품’을 넘어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으로 변모한 지형을 해부하며 식량 시스템 속 노동 착취 문제를 지적한다. 가나와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부는 하루에 1달러 이하를 벌지만, 미국의 소비자는 초콜릿 하나를 사는 데 그들의 일당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원재료가 헐값에 부유한 나라로 수출돼 화려한 소비재로 둔갑하는 현상은 중저소득 국가에서 생산되는 다른 농산물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불평등은 대형 유통 업체들이 공급 업체를 지나치게 압박해 노동자를 착취하도록 만든 결과다. 공급망 내부에서 현대판 노예제가 생겨나도록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어린아이까지 노동 현장으로 내모는 노동 학대는 식량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라, 단 한 번도 제거된 적 없는 ‘기능’이자 ‘적응적 이점’이라는 설명이다. 식량 생산자를 쥐어짠 국가와 기업은 저렴한 먹거리를 과잉 공급하며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이익을 챙겨 왔다.
동물 역시 단가 절감을 위해 생명이 아닌 도구로만 취급된다. 닭들은 A4 용지보다 좁은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고, 암퇘지들은 임신 우리에 갇혀 지낸다. 가축은 초고속 성장을 하도록 사육돼 다리 골절과 장기 부전의 고통까지 겪게 된다.
이러한 착취 구조를 끊으려는 시도는 식품 가격 상승이라는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성공을 하지 못했다. 대기업의 논리는 시장을 지배하고, 소비자들은 어두운 현실을 외면한다. 선진국에서 누리는 편리한 식생활은 바다 건너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셈이다.
‘음식시민’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이러한 구조의 안락함이 주는 최면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짜인 대로 움직이는 소비자에서 권력 구조를 견제하는 주권자로 나아갈 때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다.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음식을 단순히 돈으로 교환하는 사적 상품이 아닌, 인간의 노동과 지구 생태계가 압축된 결과물로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달걀의 난각 번호를 보고 조금이라도 덜 잔인한 환경에서 나온 것을 택한다거나, 초가공 식품 대신 완전식품을 소비하는 일도 작은 실천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독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고,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한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더 나은 선택이 모인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실천적 윤리학을 강조한다. ‘지속 가능한’ 지구는 개개인이 전체성, 순환성, 다양성 등을 고려해 행동하는 변화가 있어야져야 가능하다.
책을 읽고 나면 매일 마주하던 음식은 이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미식가의 자리를 내려놓고 음식시민의 자리에 설 때, 우리의 식탁은 세계와 연대하는 미세한 혁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음식시민/줄리언 바지니 지음·김민하 옮김/인문식당
p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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