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신춘문예 희곡 ‘산울림’으로 등단
첫 사극 ‘장녹수’, ‘왕과 비’·‘명성황후’·‘신돈’
유작은 MBC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장녹수와 인수대비, 명성황후까지...격랑의 역사 한복판에 섰던 궁궐의 여인들을 안방극장으로 불러낸 ‘대하사극의 대가’ 정하연(본명 정연) 작가가 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2일 한국방송작가협회와 유족에 따르면 정 작가는 지병으로 병원을 찾았고, 전날 오후 세상을 떠났다.
1944년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연극반인 연희극예술연구회에서 무대를 익혔다.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막희곡 ‘산울림’이 당선, 같은 해 장막희곡 ‘무지개 쓰러지다’로 잡지 ‘세대’의 신인상을 받았다. 이듬해엔 ‘환상살인’이 국립극장·경향신문 공모에서 장막희곡 당선작으로 뽑혔다.
1970년대의 정하연은 충무로와 방송국, 무대를 바쁜게 오갔다. 배우 신성일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와 ‘그건 너’(1974), ‘목마와 숙녀’(1976), ‘영광의 9회말’(1977) 등의 시나리오를 썼고, 라디오 드라마를 거쳐 KBS ‘TV문학관’과 ‘전설의 고향’ 극본으로 TV에 발을 들였다. 희곡도 놓지 않았다. 극단 제작극회가 올린 ‘마로니에의 길’은 제15회 동아연극상 대상을 차지했고, 정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79년 동아연극상 특별상과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함께 품었다.
사극 작가 정하연의 시간은 50세를 넘겨 열렸다. 1995년 KBS ‘장녹수’가 첫 사극이었다. 이어 ‘조광조’(1996), ‘왕과 비’(1998~2000), ‘명성황후’(2001~2002), MBC ‘신돈’(2005~2006)을 잇따라 내놓았다. ‘명성황후’는 이미연에 이어 최명길이 타이틀롤을 넘겨받아 124회까지 이어졌다. 2011년엔 JTBC 개국 드라마 ‘인수대비’를, 2013년엔 인조의 후궁 조씨(김현주 분)를 중심에 둔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을 썼다. 배우 채시라는 ‘왕과 비’와 ‘인수대비’에서 두 차례 인수대비를 연기했다.
현대극에선 인간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SBS ‘모래 위의 욕망’(1992), KBS ‘욕망의 바다’(1997), MBC ‘욕망의 불꽃’(2010)은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인간의 상승과 파멸을 그렸다. 기억을 잃은 남자와 두 아내의 이야기를 담은 KBS ‘아내’(2003)는 원로 사극 작가가 쓴 리메이크 멜로로 화제가 됐다. 1982년 한진희·김자옥·유지인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동명 드라마를 다시 쓴 작품이다. 정 작가는 방영 당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잊고 살던 삶의 순박함을 느린 템포로 그렸다”고 했다. 중년 부부의 위기를 다룬 MBC ‘달콤한 인생’(2008)도 정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
문화사를 드라마로 옮기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EBS 문화사 시리즈 1편 ‘명동백작’(2004)은 한국전쟁 직후 서울 명동에 모여든 시인 김수영 등 문화예술인들을, 3편 ‘지금도 마로니에는’(2005)은 1960년대 청년이던 시인 김지하와 소설가 김승옥의 청춘을 그렸다.
마지막 작품은 2018년 MBC 수목극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다. 생의 끝자락에 선 주부 남현주(한혜진 분)의 마지막 사랑을 담았다. ‘왕과 비’로 1999년 KBS 연기대상 작가상을, 2000년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작가상을 받았다.
젊은 시절의 정하연에게 방송극은 부끄러운 글이었다. 소설도 희곡도 아닌, 돈을 버는 글이라는 이유에서다. 방송으로 번 돈을 더럽다 여기며 술에 취해 원고를 쓰던 무렵, 연출가 김수동에게 수백만 명이 보는 드라마를 왜 함부로 쓰느냐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 꾸지람은 오래 남았다. 2009년 한 인터뷰에서도 정 작가는 한 가지 믿음만은 놓지 않고 있었다. “작가는 글을 다루는 선비”라는 믿음이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서울병원 장례식장 5호실에 마련, 오전 9시부터 조문을 받는다. 발인은 4일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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