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 없는 내일도 없다. 동시에 어제와 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같은 내일도 없다. 우리는 아주 익숙하고 똑같은 일상 속에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매일 다른 감정과 사건, 인물을 마주한다.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고, 상처를 입으며, 새살이 돋고, 종국엔 전혀 다른 외양과 속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관계’다.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새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미세한 관계의 변화들로서의 사건과 그것의 누적된 총체로서의 우리 삶을 탁월한 성찰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급작스러운 사고도, 경천동지할 범죄도, 처절한 복수도 없지만, 가족의 테두리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만남과 이별, 애증의 복잡 미묘한 심리 변화가 대단한 흡인력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공항에서 한 중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차를 같이 타고 파리 시내로 들어서는 영화의 도입부. 두 남녀의 대화를 통해 이들의 과거와 현재가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남자는 이란계인 아마드(알리 모사파 분)로 4년째 별거 중인 마리(베레니스 베조)와 이혼 절차를 끝내기 위해 막 파리에 도착했다. 그의 전 부인인 마리는 아마드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다. 오래 전 아마드와 마리가 함께 살던 집이지만, 이제 마리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들였으며, 곧 재혼할 예정이다. 호텔 예약을 못해 파리에서의 임시 거처로 전 부인의 집에 짐을 풀게 된 아마드는 오랜만에 보는 두 딸뿐 아니라 곧 마리와 결혼할 새 남자친구 사미르(타하 라힘), 그리고 사미르의 어린 아들과 어색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다.
마리가 키우는 두 딸은 오랜만에 보는 아빠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아마드는 전 부인과 맏딸 루시가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루시는 마리의 첫남편에게서 얻은 딸로, 벌써 엄마의 세 번째 결혼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하기만 한 것이다. 엄마와는 말을 섞으려고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리의 세번째 남편이 될 사미르는 어린 아들이 문제다. 새 엄마를 맞이해야 하는 게 싫어 자꾸 엇나가기만 한다.
자신이 살던 곳, 전 부인이 집에 새로운 남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아마드는 분별있는 태도로 옛 가족과 자식들을 대한다. 엄마와 갈등을 겪는 맏딸 루시와 대화를 시도하고, 마리에게는 자식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그 와중에 아마드는 루시를 통해 사미르의 부인이 아직 살아있으며, 혼수상태로 병석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마드와 사미르, 사미르의 부인 사이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을 듣게 된다.
영화의 원제는 프랑스어 ‘르 파스(Le Passe)’다. ‘과거’라는 뜻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과거의 인연으로부터 이어진 관계 속에 있지만, 아무도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랑도, 질투도, 미련도, 아쉬움도, 그리움도 모두 다 변했다. 어떤 것은 색이 바래고, 어떤 것은 사라졌으며, 어떤 것은 더 집요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과거에 당신은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나를 도대체 사랑했는지, 왜 우린 헤어져야 했는지,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물음은 부질없고 진실은 과거 속에 있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여기’야말로 모든 관계에 대한 궁극적인 ‘응답’일 뿐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마주잡은 두 손을 클로즈업하면서 끝나는 영화의 엔딩이 긴 여운을 남긴다.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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