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회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잣대로 흔히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든다. 신수, 언변, 문필력, 판단력을 일컫는 말로 중국 당나라때 이후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널리 쓰였다. 따거(중국말로 ‘큰형님’)라는 별명이 윤증현 전 장관을 총론으로 잘 표현한다면, 각론에서 그를 설명하는 말은 ‘신언서판을 두루 갖춘 인물’이 아닐까?
신(身) : 진지함과 따스함이 묻어나는 호남형
윤 장관은 신수가 좋다. 요즘 신세대가 열광하는 작은 얼굴의 꽃미남은 아니지만 존 웨인을 연상케 하는 곧은 콧날과 호남형의 큰 얼굴에서 카리스마가 절로 풍긴다. 그의 얼굴에는 진지함과 따스함이 공존한다. 우리경제를 걱정하는 굳게 닫힌 입술과 격식 없이 웃을 때 드러나는 눈가의 주름은 각종 매체의 단골 사진이었다. 작년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휠체어를 탄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이고 대화하는 모습은 한동안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언(言)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 윤 장관의 말은 청산유수 스타일은 아니다. 날카로운 논리와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빨려 들어간다. 머리보다 마음을 먼저 움직이게 한다. 국회에서 여야의원과 논쟁을 벌여도, “당대의 전문가이신 의원님의 충고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경륜이 높고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보시는 의원님이 왜 그런 지적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대응하며 어려운 국면을 돈 안 들이고 쉽게 풀어내곤 한다. 그래서인지 의원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사례가 드물다. 저녁이라도 같이 하면 시간 가는줄 모른다. 고교시절 영화감독을 꿈꿨을 만큼 레퍼토리도 서부영화에서부터 박경리의 토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분노의 포도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서(書) : 논리의 보고서, 감성의 편지 선이 굵은 이미지와 달리 윤 장관은 아주 꼼꼼하다. 혈액형도 A형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보고서로는 그를 만족시키기 쉽지 않다. 본인의 글 솜씨가 좋을 뿐 아니라 사고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보고서의 콘텐츠가 부실하거나 빈틈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직원들을 향한 그의 글에는 따스함과 감성이 가득하다. 그는 직원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에게 ‘고양이 덕은 알아도 며느리 덕은 모른다’라는 속담을 빌어 고마움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하고, 과로로 유명을 달리한 직원을 언급하며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마음 속 상복을 쉽게 벗지 못할 것 같다’는 편지로 많은 직원을 울리기도 했다.
판(判) :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정책대응
2009년 기획재정부 장관 취임 직후 새 경제팀의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당시 경제전망치 수정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마이너스 성장수치를 발표하면 경제심리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포함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 하지만 시장신뢰 회복이 우선이라는 믿음 하에 그는 주저 없이 전망치를 현실화했다. 3%였던 성장 전망치를 마이너스 2%로 낮추고, 전망치 수정과 함께 정책기조도 바꿨다. 역대 최대규모의 추경과 일자리사업,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추진했다. 오래지 않아 시장도 반응했다. 대부분 선진국이 마이너스 성장한 그 해 우리 경제는 플러스 0.3% 성장했고 2010년에는 8년만의 최고 성장률(6.2%)을 기록했다.
법대를 졸업한 윤 장관은 정통 이코노미스트는 아니다. 경제적 합리성과 거리가 있는 선택이나 기존 관행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법과 원칙에 대한 신뢰,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무게중심, 꼼꼼한 준비와 두둑한 배짱,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지향하는 근본가치를 포기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그릇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는다.
결론적으로 윤 장관은 고약스런 선배다. 청출어람이라면 후배들이 그를 뛰어 넘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크니 말이다.
kimh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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