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제2법칙. 최근 유통시장을 보며 학창시절에 배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원리가 떠올랐다. 엔트로피는 쉽게 말하면 ‘무질서도’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듯 정리된 상태가 시간이 지날수록 흐트러진다는 개념이다. 핵심은 방향성이다. 되돌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0년 전 시장은 ‘낮은 엔트로피’ 상태였다.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등 판매 채널은 명확했다. 이마트는 가족 쇼핑, 세븐일레븐은 간식, 신세계백화점은 명품처럼 말이다. 소비자 동선도 예측할 수 있었다. 제조-도매-소매 단계가 뚜렷했고, 수익 구조는 단순했다. 가격은 안정적이었다. 할인 행사는 정해진 기간에만 열렸다. 분자가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정체된 시장이었다.

현재 시장의 엔트로피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쿠팡이 로켓배송으로 대형마트를 위협하고, 네이버는 홈쇼핑을 잠식한다. 무신사는 백화점 수요를 흡수한다. 컬리와 G마켓은 동네 슈퍼를 대체하고 있다. 경계는 흐려졌다. 그리고 공급망은 복잡해졌다. 직구, 구매대행, 크로스보더, 풀필먼트, 라스트마일 등 과거에 없던 용어가 난무한다. 중간 유통을 없앤다던 D2C(소비자 대상 직접 판매)의 중간 과정은 오히려 늘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격은 제각각이다.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다. 정보 독점도, 진입장벽도 함께 무너졌다. 보이는 가격이 전부였던 20년 전과 달리 지금은 누구나 전국 최저가를 검색한다. 스마트스토어 개설 비용은 0원에 수렴한다. 1인 셀러들은 자유롭게 플랫폼에서 경쟁한다. AI(인공지능) 추천, 실시간 재고, 당일배송까지 선택지가 쏟아진다. 경쟁자의 난입은 엔트로피를 더 빠르게 올리는 촉매가 됐다.

물리학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에너지 소모를 의미한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버티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한다. 살아남더라도 수익은 줄어든다. 소비자 입장에선 ‘결정 피로’가 심화된다. 기업의 취약성도 커진다. 인프라에 수조원을 쏟아부은 쿠팡마저 개인정보 유출로 흔들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쿠팡만의 문제가 아니다.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모든 기업은 동일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 중동발 리스크와 노란봉투법, 정부의 물가 안정 압박 등 외부 변수는 차고 넘친다.

엔트로피를 낮추려면 외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규제가 그런 역할을 한다. 예컨대 공정위는 플랫폼의 갑질을 제재한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과도한 데이터 수집을 막는다. 하지만 규제는 양날의 검이다. 과하면 혁신을 막고, 부족하면 무질서를 키운다. ‘최소한의 기준선’이어야 한다.

열역학에는 ‘열적 평형’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만 이는 모든 것이 같은 온도가 된 상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다. 완전한 균형은 정체다. ‘불균형 속의 질서’가 필요하다. 올리브영이 하나의 사례다. 온라인 시대에 매장을 체험 거점으로 바꿨다. 온라인에서 검색하고, 매장에서 바르고, 앱으로 결제한다. 자기만의 순환 구조다. 공급망을 효율화하는 기술 투자, 소비자 신뢰를 높일 데이터 윤리, 혁신을 죽이지 않는 규제도 같은 방향이다. 엔트로피는 되돌릴 수 없다. 다만 어디에 에너지를 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정찬수 소비자경제부장


and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