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첫 서울시장 되자마자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서 진두지휘 조순,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반복되는 참사 원인 진단

유독 흰 눈썹이 눈에 띈다. 양끝 옆으로 휘날리는 백미(白眉)에서 힘이 느껴진다. 지팡이를 짚고 서 있지만 내뿜는 에너지는 젊은 사람 못지 않다.

여든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방선거를 한달여 앞둔 시점에서 민선 1기 서울시장을 지낸 조순 전 부총리를 만났다. 우리 시대에 6ㆍ25 전쟁 세대만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있을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백미최량(白眉最良ㆍ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 사실 그를 어떻게 불러야할지부터 망설여진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에서 대한민국 부총리(경제기획원 장관 겸직)로 관계에 입문해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고 ‘작은 대통령’으로 불리는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행정가로 변신했다.

정계로도 진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당명을 짓고 총재 자리에 올랐다 뒤늦게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입문에 발판을 마련해 준 이도 그였다.

20여년 전 TV프로그램인 ‘판관 포청천’이 방영될 때는 주변에서 ‘대한민국의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만큼 청렴결백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황희 정승으로 평가받았다.

▶고무신 신은 한국인 유학생=조 전 부총리는 6ㆍ25 참전용사다. 전쟁 발발 이듬해 입대한 그는 6년 넘게 군 생활을 했다.

입대 직전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제대 후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입대 전 서울상대 전문부(일종의 초급대학) 졸업장으로 잠시 교편을 잡은 게 다였다. 공부 밖에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제대 무렵 무작정 미국유학을 준비했다.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할 나이인데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니 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었죠. 학부부터 하자는 생각에 시간 날 때마다 이름있는 미국 대학교에 편지를 썼어요. 그러다 ‘보든컬리지(Bowdoin College)’에서 딱 1년만 장학생으로 받아주겠다는 입학 허가가 떨어졌죠.”

유학길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시 형편으로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갈 수 없었다. 1년짜리 입학통지서로는 학생비자조차 받기 어려웠다. 인생이 걸려 있던 그는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에게 통사정했다. “1년 만이라도 좋으니 미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시오. 1년 후 에는 내가 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미국대사관 직원은 그에게 단기 비자를 발급해줬다. 가까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한국에 남겨둔 아내와 자식, 부모 생각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쉰다는 것은 사치였다. 기숙사에 살면서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약속된 1년이 지났지만 여기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보든컬리지 기숙사 학생회장을 찾아갔다.다행히 학생회장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동병상련이 통했다. 기회가 왔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설득해야 했다.

“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습니다. 한국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어렵게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저는 여기에 올 때 졸업하기 위해 왔지 1년만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전교생을 감동시켰다. 찬반 투표를 할 필요없이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는 4년제 학부를 3년만에 졸업했다. 담당 교수의 추천으로 하버드대학교와 버클리대학교, 시카고대학교에서 대학원 입학 허가가 떨어졌다. 돈 걱정부터 앞섰다. 월급쟁이지만 조교를 할 수 있는 버클리대학교를 선택했다.

“군대에서 입었던 군복을 가져와 입고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어요. 집안에 유력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다 해결했죠. 그렇게 9년 동안 미국에서 지냈어요. 그러니까 딱 두 가지가 생기더라구요. 바로 자신감과 겸손함입니다.”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첫 업무=관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곳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이었지만, ‘공복’으로서 제대로 봉사할 수 있었던 곳은 서울시였다.

“제가 여러 곳에서 공직생활을 해봤지만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가 제일 좋았습니다. 중앙 정부에 가면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모든 업무에 대통령 결제가 필요했죠. 반면 서울시장은 재량권이 있었어요.”

민선 1기 서울시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시장 취임 직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사망자만 500명이 넘는 사상 최악의 국가 재난이었다. 제대로 취임식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그게 취임식이었죠. 서울시 힘은 강력했습니다. 모든 구조 장비와 인력이 서울시에서 다 꾸려졌고 일치단결해 수습했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었죠.”

당시 정부로부터 사고 수습 지원금을 받기 위해 청와대를‘ 삼고초려’한 일화는 유명하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서울에서 일어난 사고일 뿐 국가 재난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세번이나 찾아가 정부 지원금을 약속 받았지만 관료들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런 저런 변명을 대면서 지원이 어렵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답답하기는 김 대통령도 마찬가지. 결국 국무총리에게 일을 맡겼고, 총리는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면서 담당 부처를 호되게 질타했다.

“대통령의 명령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지듯이 중간에서 사라지더라구요. 한번은 해당 부처 담당자에게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세월호 참사, 결국은 교육 문제”=20여년이 지났지만 참사는 반복됐다.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는 조 전 부총리의 시선에서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는 반복되는 참사의 원인을 부실한 교육 문제로 접근했다.

“책임감 없이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 오락가락하는 정부, 궁극적으로 보면 교육이 잘못 됐습니다. 평소에 선장과 승무원, 공무원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철저히 교육시켰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교육을 안 시키고 직책을 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거죠.”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오랜 생각에서 나오는 발언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은 돈벌이 위주로 가르칩니다. 물론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온 것도 좋은 인재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출세하고 돈 버는 것만 가르쳤기 때문에 도덕성과 윤리는 아예 사라졌죠. 가정이 파괴되고 공교육이 붕괴되고 사회에 평화가 없어진 것도 같은 이유죠.”

20여년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그가 돈벌이 교육을 질타하다니…. 아이러니하지만 설득력은 충분하다.

“제 때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뭐든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었죠. 지금은 대학을 나와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솔직히 틀렸어요. 과거로 돌아가기는 힘들지만 교육 체계와 내용을 모두 바꿔야 합니다.”

조 전 부총리는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논문을 쓰고 있다. 주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경쟁운영의 원리’.

“한국 경제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는 앞으로 과거 방식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국민의 정신을 쇄신할만한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평등사회가 성장을 해치지 않는다’는 외국 신문 사설을 읽었습니다. 우리도 이런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한국 현대경제학의 초석을 놓은 그가 제시하는 자성과 반성의 메시지다. ‘현대경제학의 반성’이라는 부제가 붙을 만하다. 올해 말 발표될 그의 논문이 한국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기대된다.

조순이 걸어온 길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46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

▶1957년 보든대학 경제학 학사

▶1960년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대학원 경제학 박사

▶196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1988년 제17대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1992년 한국은행 총재

▶1995년 제30대 서울특별시장

▶1997년 한나라당 총재

▶1998년 제15대 국회의원

▶200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2009년 한ㆍ러문화경제협회 대회장

이진용ㆍ최진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