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곽 프랑스 고교로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유럽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에 고물가, 생활비 급등, 부실한 공공서비스, 낮은 임금, 주택난, 정부 긴축재정에 대한 노동자, 시민들의 반발이 더해지면서 주말마다 대규모 시위대가 프랑스 전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주요 도시 거리를 채우고 있다.
시위는 지난 9월 중순 프랑스 크레테유 한 고교에서 시작됐다. 학생과 교사, 부모들이 교사 부족, 노후한 학교, 수업 공백, 과도한 학업 부담 등을 문제삼으며 학교 점거와 시위에 나섰고 곧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돼 이달 초엔 전체 고교 3700여개 중 4분의 1이 넘는 1000여 곳으로 확대됐다. 처음에는 고교생 중심에서 교원노조와 교사 단체들이 합세했고, 노동자·농민·환경미화원·소방관·철도노동자들도 참여했다. 특히 8년 전인 2018년 유류세 인상을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던 ‘노란조끼’측이 가세하면서 지난 17일(현지시간)을 기점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에 대한 반대 시위로 격화됐다. 이날 시위주최측 추산 80만명, 정부 추산 55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노란조끼’가 프랑스 시위의 상징이라면 이탈리아는 ‘광장의 이탈리아’(Italia in Piazza)다. 이탈리아 노조단체와 ‘광장의 이탈리아’는 17일 로마, 밀라노, 토리노, 볼로냐 등 대도시에서 역시 물가폭등과 공공서비스 부실화 등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전날에는 주요 도시에서 프랑스 학생들에 동조하는 젊은이들도 거리에 나서 조르자 멜로니 총리에 반대하는 ‘노 멜로니 데이’ 시위를 벌였다. 이탈리아 최대 노조인 CGIL은 유럽 학생들의 대대적 시위가 예고된 내달 20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벨기에는 수도 브뤼셀과 프랑스어권 중심도시인 리에주를 중심으로 등록금 인상 반대와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주거비 상승과 주택난이 핵심 의제다. 지난달 87세 노인 세입자가 강제 퇴거 당하고 의회가 세입자 보호 법령 2건을 부결시킨 일을 계기로 전국 50개 도시에서 수만~수십만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열렸다. 천막 농성과 총파업 호소도 이어지고 있다. 포르투갈에서도 주거문제 해결과 임금인상·연금개혁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신랄한 구호들
유럽의 학생들과 청년, 시민, 노동자들의 분출되는 요구는 시위에 등장한 구호와 팻말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곳에서 교육개혁과 부자·기성세대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학생·청년들의 요구가 가장 눈에 띈다.
프랑스 학생들은 “예산 없는 학교=미래가 없는 국가!” “학생 앞엔 교사를, 학교에는 예산을!” “학교에 경찰 장갑차 대신 예산을 투입하라!”와 같은 말로 교육 예산 확충과 경찰 진압 반대를 외쳤다. “청년들에게 지붕(집)과 일자리, 미래를 달라!”거나 “모두에게 학생 식당과 기숙사를, 배고픔은 사절!”이라는 구호도 있었다. 경찰의 무력 진압을 말장난으로 풍자하는 “우리는 대입자격시험(BAC)을 원하지, 범죄대응반(BAC)을 원하지 않는다!”와 같은 팻말도 눈에 띄었다. “챗GPT야, 정규 교사 한 명 만들어줘” “마크롱은 그래도 프랑스어 선생님이 있었다” 등의 말로는 교육 현실을 풍자했다.
이탈리아와 벨기에, 독일 청년들도 “전쟁 아닌 학교에 돈을!” “폭탄 대신 교실을!” “부자는 전쟁을, 청년은 미래를 원한다” 등과 같은 문구로 정부에 항의했다.
생활고 타개와 정부 퇴진을 원하는 시민과 노동자들의 분노도 담겼다. 프랑스에선 “마크롱은 떠나고 권력을 민중에게!” “마크롱 우리의 분노가 보이는가!” “컨설팅 사무소 대신 진료소를!” “철도노동자와 노란조끼가 마크롱을 탈선시키자!” “우리는 연명이 아닌 삶을 원한다!” “심지어 콘돔조차 국가보다 우리를 더 잘 보호해 준다!” 등의 시위 팻말이 나왔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에서는 “임금 인상” “생활비 폭등 그만!” “더 싼 주택을!” “의료와 교육에 더 많은 지원을!” “브뤼셀에서 마드리드까지, 강제퇴거는 사람을 죽인다” “집은 비어 있는데, 사람은 집이 없다” “부동산 투기 그만!” “임대료 인하!” “주거는 권리이지 사업 수단이 아니다” “50세가 되기 전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다” “긴축재정 반대” “피땀 흘려 번 돈이다! 당신의 노동, 건강, 연금을 지켜라”와 같은 문구로 각종 요구를 표출했다.
‘비스밀라, 세 레 테네브르’ 연대와 풍자의 밈
프랑스로부터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번진 이번 시위를 상징하는 밈이자 구호는 “비스밀라 세 레 테네브르”(Bismillah, c’est les ténèbres”다. ‘비스밀라’는 아랍어로 이슬람권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말로 “신(알라)의 이름으로”라는 뜻이다. ‘세 레 테네브르’는 “이곳은 (온통) 어둠”이라는 의미다. 곧 “신의 이름으로, 지금은 어둠의 시대다”라는 정도의 뜻일 터다.
학생과 청년들의 현실을 비유한 말이지만, 이 문구는 그것과 별개로 공권력과 기성세대에 대한 풍자의 맥락으로 유행했다. 이달 초 학생들이 학교 봉쇄(점거)와 시위 일정을 공유하던 소셜미디어인 스냅챗에 경찰로 위장한 이로 의심되는 계정이 들어와 문제의 문구가 포함된 문장으로 학생들의 계획을 물어본 데서 유래했다. 아랍어 표현을 어색하게 조합하고 심지어는 문법도 틀린 말(c’est가 아닌 ce sont이 맞는 표현)로 십대 고교생들이 쓰는 말투를 흉내내려고 한 것인데, 이것이 권위·권력에 대한 조롱과 집단적 유대감의 상징으로 정착한 것이다. 이 밈은 온라인은 물론 실제 시위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프랑스는 물론 벨기에와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으로까지 번졌다.
경제의 실패, 정치의 무능, 극단주의의 발호, 시위의 폭력화
이번 시위의 원인은 한마디로 국민의 생활고와 정부의 재정난이다. 문제는 경제이지만 사태의 원인과 전개는 단순하지 않다. 시위 역시 평화행진과 약탈, 방화, 파괴 행위가 뒤섞여 있고, 시위대엔 진학·취업을 앞둔 청년과 임금인상을 원하는 노동자, 연금·복지혜택을 지키려는 은퇴세대가 함께 있다. ‘반파시즘’ 구호와 ‘반이민’ 요구도 혼재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통상·안보 공세와 중국 산업의 거센 도전, 중동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몰고 온 외부의 거센 충격과 경제 성장 동력의 퇴조, 방만한 복지 지출 및 재정 적자의 누적 등 원인도 복합돼 있다.
프랑스의 9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3.1%가 올랐고, 에너지 가격 상승률은 무려 21.3%였다. 프랑스의 공공지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57.2%로 유럽연합(EU) 평균 49.5%보다 높고, 국가 부채는 내년 GDP의 12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스 정부는 정부 부채 이자로만 지난해 660억유로를 썼고 올해 상반기엔 전년동기 대비 19%가 늘었다. 프랑스 정부는 공공부문 임금 동결 등 430억유로 규모의 신규 재정 절감 조처를 담은 내년도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결국 교육·복지·공공서비스 예산을 줄이는 긴축재정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이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극렬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등도 긴축재정과 복지 축소에 대한 반발이 시위의 핵심 원인이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19일 ‘프랑스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지난 10년간 정치적 재편의 결과’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17일 프랑스 전역에서 발생한 폭력 시위 사태는 마크롱 재임 기간 동안 정치 체제가 변화한 결과이며, 이는 갈등 중심적인 사회관과 대립적인 접근 방식을 조장하는 급진 정당들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집권한 이후 기존 중도·좌우 주류 정당이 약화하고 극우와 급진좌파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정부의 갈등 조정 능력 약화, 청년층의 미래에 대한 불안, 국가부채와 재정위기가 더해져 과열·폭력화한 이번 시위가 비롯됐다는 것이다. 내년 5월 대선을 앞둔 가운데 최근 여론조사에선 극우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의원이 37%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18%로 2위를 달리는 급진좌파당 LFI(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35세 미만 유권자의 47% 지지를 얻으며 거리 시위대 편에 공개적으로 섰다.
마크롱 대통령은 시위 중 약탈·폭력행위에 대해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다”고 말했으며,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극좌가 우리나라 전역에 깊은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했다. 르펜 의원은 “우리는 수십년간 고삐 풀린 이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좌파 세력이 폭력을 정당화했다”고 했다. 멜랑숑 대표는 “문제의 핵심은 시위대의 요구, 학생들이 직면한 문제, 높은 생활비”라며 정부야말로 “무능함으로 점철돼 빚은 혼란에 책임이 있다”며 “고 했다. 정부는 사태를 해결할 어떤 대안과 조치도 내놓지 못하고, 극단화된 정치세력들은 서로 ‘네탓’ 공방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유능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경제에 대한 불만과 반정부 정서는 비단 유럽 국가들 뿐만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내달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임기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공통의 구조적 원인이 있다. 경제성장과 체감 생활 수준의 괴리, 재정건전화의 비용을 둘러싼 갈등, 청년층의 미래에 대한 불안, 주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다.
그렇다면, 답은 있는가. 칼럼니스트이자 외교전문가인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가 이번 사태를 예견하듯 지난 7월 24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하나의 혁명이 전개되고 있다. 모든 곳의 유권자들이 분노하고 있다-런던에서 도쿄까지 각국 정부는 새로운 시대 국민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긴 제목의 칼럼에서 첨단기술시대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정부의 역할을 진단하고 있다. 그는 주요국 정부들이 모두 낮은 여론지지율과 정권교체 위협에 빠져 있다고 했다. 영국에선 10년도 안 되는 기간 7명의 총리가 교체됐고, 차기 프랑스 대통령으로는 극우 정당의 마리 르펜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독일 역시 극우 정당 AfD가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같은 임기 시점 최저 지지율에 근접하고 있다. 그는 “신중하고 심지어 지루하다고 여겨지던 동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 즉 일본, 한국, 대만 조차도 커져가는 국민적 분노 속에서 정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이들 민주주의 국가들의 공통점은 지난 30년간 정부가 부채를 두 배나 늘리면서 현재 GDP의 평균 40%가 넘는 지출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비싼 집값, 소득 정체, 불평등 확대로 정부 지출이 국민들에게 큰 소용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이다.
미국은 강력한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고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실업률을 낮췄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 투자 프로젝트를 유치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며, 일본은 경제회복을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국가에서 민주주의 정부는 인기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까. 자카리아 박사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제도의 발전의 격차, 곧 기술과 민주주의 간의 속도 격차를 꼽았다. 그는 “우리는 3분만에 차를 부르고, 택배는 당일 배송되며, 인공지능은 몇 초만에 답한다”며 “당연히 시민들은 정부에서도 이와 같은 효율성을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속도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위해 설계됐다”며 “민주주의는 협상하고, 타협하고, 법원과 협의하고,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율한다”는 것이 자카리아 박사의 통찰이다. 그는 “자유 사회는 급격한 기술 변혁 속에서 종종 가장 취약해 보이는데 이는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카리아 박사는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럴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역량을 통해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주택과 사회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공공서비스를 현대화하고, 기술 변화에 대처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 자카리아 박사의 최종 결론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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