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혜림 기자] 현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목초액을 연상시키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무를 태운 듯한 역한 냄새에 방진 마스크 없이는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한 차례 화마가 지나간 서울의 한 가정집은 그날의 참사를 짐작케 하는 잿더미와 유리조각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기자의 눈에는 발화점은커녕, 발에 채이는 까만 것들이 무엇의 잔해인지조차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문짝이 녹아내린 냉장고를 부엌 찬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30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 화재폭발감식팀 소속 경찰 4명과 함께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현장을 찾았다. ‘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화재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화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가족 4명 중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였기에, 이날 현장에는 소방본부 화재조사팀, 한국 전기안전공사, 한국 가스안전공사 사고조사팀 등 약 10명도 함께 동행했다.
‘크린가드(방진복)’와 ‘방진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은 현장에 들어가기 전, 해당 지역 담당 형사에게 사고 브리핑을 간략히 전해 들었다.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진압할 당시 ‘플래시오버(flash overㆍ복사열에 의해 순간적으로 연소가 확대되는 현상)’와 ‘백드래프트(backdraftㆍ산소가 부족하거나 일시적으로 산소가 다량 공급돼 연소가스가 순간적으로 발화하는 현상)’까지 발생한 사고였다.
두 차례의 ‘폭발’이 벌어졌던 집안은 물과 잿더미가 뒤엉켜 엉망이었다. 화재 진압 직후 현장에 가면 보통 3㎝ 정도의 물이 바닥에 고여있다고 했다.
전날에도 한 차례 물을 퍼냈지만, 아직도 군데군데 웅덩이가 남아 하얀 방진복 위로 금새 검은 점이 생길 정도였다.
때문에 감식팀 대원 대부분은 본격적인 원인 규명을 위한 ‘바닥 발굴’ 작업에 앞서, 넉가래로 바닥의 검은 물을 퍼내야만 했다. 나머지 대원은 컴컴한 어둠 속을 시종 후레쉬로 비춰가며 현장을 꼼꼼히 살펴봤다.
천으로 물기까지 닦아내자 비교적 깨끗해진 바닥에는 불에 탄 흔적과 타지 않은 흔적이 뒤섞인 ‘지도’가 나타났다.
화재폭발감식팀 팀장인 이상준 경위는 이러한 지도가 “화재 감식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설명했다.
가구가 놓인 자리는 불이 붙어도 바닥면은 그을지 않기 때문에 추후 화재 진압으로 배치 등이 엉망이 되더라도 타지 않은 면을 바탕으로 퍼즐 맞추듯 유추해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그을은 쪽이 화재의 진행 방향일 확률이 높다.
이날 이 경위가 지목한 가장 유력한 발화 원인은 가스렌지였다. 불에 탄 냄비와 45도가량 돌아간 가스렌지 버튼, 열린 중간벨브 등이 단서였다.
이 경위는 “외부에서 발생한 불 때문에 냄비가 그을었다면 안에 있는 음식물이 손으로 긁으면 떨어져 나갔겠지만, 냄비 자체가 열이 받아 불이 난 경우면 음식이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엌 형광등 안쪽 전선에서 나타난 합선의 흔적도 가스렌지가 화재의 주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전기가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전선에 불이 붙어 합선이 될 경우 스파크가 튀며 전선에 ‘금색 점’이 맺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불길을 추정할 수 있다.
이같은 전선의 합선 형태는 화재의 원인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요긴하게 활용된다. 또 공기 흐름이나 가구 상태 등도 현장을 분석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날도 공기 흐름을 읽지 못한 일부 전문가들이 거실을 최초 발화점으로 지목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엌에 비해 거실이 더 많이 탄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그러나 불은 산소가 희박한 쪽에서 풍부한 쪽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넓은 거실에서 상대적으로 좁고 밀폐된 공간인 부엌으로 옮겨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거실 천장이 나무로 이뤄진 것도 부엌이 최초 발화점이라는 데 힘을 실어줬다. 뜨거운 성질 탓에 천장을 타고 이동하는 불이 옮겨붙기 좋은 매개체기 때문이었다.
약 2시간 정도의 화재 원인 조사가 끝나자 감식대원들은 현장에서 수거한 냄비와 가스렌지, 형광등 후드 등을 촬영했다. 담당 형사도 감식대원들이 추정한 원인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후 가스안전공사 측이 보다 정확한 감식을 위해 냄비 등을 모두 수거해갔다.
이 경위는 이를 마지막으로 모든 조사가 마무리되자 기자에게 “우리가 현장에서 만나는 건 최종적으로 남은 흔적이지만, 그 과정을 짐작해 발화 지점을 찾는 게 최후 목적”이라며 “이를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rim@heraldcorp.com
*사진=박혜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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