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성 · 진정성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불굴의 인생역정…권용원 키움증권 대표가 말하는 그의 삶 · 그의 경영철학은

기술고시 거쳐 과천서 시작한 공직생활…‘반도체 망국론’ 팽배하던 때 오직 국가정책 위해 몸던져 일만…

39세 안정적인 생활 박차고 뛰어든 벤처, ‘벤처버블 붕괴’ 위기속 계열사 합병·청산 등 발로 뛰며 경쟁력 돌아보게 돼

미국발 금융위기 직격탄에 흔들리던 2009년, 키움증권 대표에 취임…5년간 성장 밑거름 ‘차별화 DNA’로 IPO분야서 두각

‘어려울수록 되돌아볼 수 있는 위기가 도전기회’란 신념으로 직원들과 끊임없는 소통…진정성으로 현장서 답을 찾는, 난 여전히 변신 중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에 겁없이 맞선다면 삶의 궤적은 극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권용원(52) 키움증권 대표가 바로 그런 삶의 주인공이다. 그는 낯선 길을 주저없이 걸어왔다. 고시 출신으로 잘나가던 공무원 생활을 박차고 택한 벤처기업 경영진, 그리고 공대 출신으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에 이르기까지 그에겐 익숙한 길을 거부하는 DNA가 살아숨쉬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이단아라고 부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매서운 바람으로 겨울의 초입을 알린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키움증권 본사에서 만난 권 대표는 개인적인 삶과 평범치 않았던 인생역정, 경영철학에 대해 막힘없이 쏟아냈다. 쉬운 길은 싫다는 신조가 그가 걸어온 길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3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직후 “약속 없으면 밥이나 먹자”는 권 대표의 권유에 곧바로 저녁자리로 이어졌다. 중요한 만남이 있을 때면 가끔씩 들른다는 마포의 고깃집에서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는 어느새 자정 가까이에 이르렀다. 오후 3시에 만나 자정 무렵까지 장장 9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키움다움’이란 무엇인지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역동성과 도전, 젊음, 패기라는 단어가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과천에서 보낸 청춘, 아직도 살아 숨쉬는 상공부의 DNA=서울대 전자과 80학번인 권 대표는 대학 진학 때부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길을 등졌다. 고교 시절만 해도 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 공부를 곧잘 하던 소년은 의대 교수였던 부친을 따라 의대로 진학할 줄 알았다. 그가 택한 곳은 의예과가 아닌 전자과였다. 다시 허를 찌르며 방향을 전환한 것은 대학 졸업 때였다. 대기업 직원이나 대학교수를 꿈꾸던 동기와 달리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선택한 방식은 행정고시가 아닌 기술고시였다. 대학원에서 전공한 반도체 관련 지식을 살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권용원(기업인/키움증권대표이사사장)
권용원 키움증권 대표를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권 대표가 기술고시를 거쳐 상공부 사무관이 되면서부터다. 내가 1990년대 초 전자공업국장으로 부임하자 그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는 핵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 국장은 그가 국전체에서 핵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보나 당시 잘나가는 공무원이 선호하는 해외유학도 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라도 없으면 업무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권용원(기업인/키움증권대표이사사장) 권용원 키움증권 대표를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권 대표가 기술고시를 거쳐 상공부 사무관이 되면서부터다. 내가 1990년대 초 전자공업국장으로 부임하자 그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는 핵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 국장은 그가 국전체에서 핵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보나 당시 잘나가는 공무원이 선호하는 해외유학도 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라도 없으면 업무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시작된 공직자의 길. 권 대표는 15년 동안 관악산 아래 과천에서 거의 미친듯이 일했다고 회고했다. “대학원 시절 운 좋게 기술고시 1, 2차를 한 번에 붙었어요. 마치 운명같았죠. 초임 사무관 시절부터 내내 반도체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그 시절 원없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저의 20대와 30대를 바친 친정과도 같은 곳입니다.”

공직생활과 함께 겁없는 도전은 시작됐다. 권 대표의 초임 사무관 시절에는 ‘반도체 망국론’이 팽배하던 분위기였다. 일본 기업이 석권하던 반도체시장에 막 뛰어든 삼성전자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에 대한 국가적 논의가 활발했다.

상공부의 내부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국가 경제규모를 한 단계 키울 수 있는 산업을 위해 한번 의기투합해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한 때였고, 초임 사무관은 밤낮없이 뛰었다. 야전에서 이희범 전 장관, 한덕수 전 총리, 오영교 전 장관 등 쟁쟁한 상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배울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이해관계가 다른 각 부처의 틈바구니에서 반도체 연구개발을 지원ㆍ육성하는 국가정책을 위해 다함께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모르기에 겁없이 덤볐고, 그러기에 이뤄낼 수 있었죠. 이때부터 어떤 일이든 부딪히며 해결하려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직장생활의 절반을 바치면서 쉴새없이 일했던 날들은 세계 반도체시장을 주름잡는 국내 대기업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으로 보상받았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핀잔을 주던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는 자신감은 큰 자산이 됐다. 그리고 그의 도전정신에 면면히 흐르는 DNA로 자리잡았다. 권 대표에게 ‘상공부의 피’는 아직도 흐르고 있었고, 그는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공직을 박차고 벤처기업에서 승부수를 띄우다=앞만 보고 달려온 공직생활은 탄탄대로였다. 199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할 정도로 부처 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권 대표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39세가 되던 해 산업기술과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접는다는 건 큰 모험이었다. 권 대표에겐 기업으로 가서 직접 뛰어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인생 2막을 시작한 곳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1세대 벤처기업 다우기술이었다.

“다들 대기업에 가지 않을까 추측했죠. 제가 가서 할 일이 많은 조직, 저를 필요로 하는 조직이 선택 기준이었습니다. 단위업무를 맡는 대기업보다는 다양하게 많은 일을 접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다우기술을 택했죠.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맡은 조직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때 성취감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2000년 다우기술로 옮기자마자 위기가 찾아왔다. 벤처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을 날리던 벤처가 하나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권 대표는 다우기술에서 구조조정본부를 총괄하는 일을 맡았다. 입사 직후 5~6년 동안 부사장직을 겸직하면서 다우기술의 계열사를 관리하고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계열사를 합병ㆍ청산하고 매각ㆍ매입하는 작업 모두 권 대표의 손을 거쳤다.

“뭐든지 가서 직접 해결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중소기업의 계열사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기업과는 많이 다릅니다. 앉아서 보고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죠. 계열사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5~6년 죽어라 일하니 그룹이 전체적으로 턴어라운드했습니다. 대기업에선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죠. 공무원 사회와는 또 다른 시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결단을 미루지 않고 직접 부딪히는 제 경쟁력을 스스로 확인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권용원(기업인/키움증권대표이사사장)
권용원 키움증권 대표를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권 대표가 기술고시를 거쳐 상공부 사무관이 되면서부터다. 내가 1990년대 초 전자공업국장으로 부임하자 그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는 핵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 국장은 그가 국전체에서 핵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보나 당시 잘나가는 공무원이 선호하는 해외유학도 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라도 없으면 업무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권용원(기업인/키움증권대표이사사장) 권용원 키움증권 대표를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권 대표가 기술고시를 거쳐 상공부 사무관이 되면서부터다. 내가 1990년대 초 전자공업국장으로 부임하자 그는 우리나라 통신산업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는 핵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대 국장은 그가 국전체에서 핵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보나 당시 잘나가는 공무원이 선호하는 해외유학도 보내지 않았다. 일분 일초라도 없으면 업무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위기에서 시작된 본게임, 증권에서 ‘키움다움’을 찾다=한숨 돌리던 그에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다. 창투사인 키움인베스트먼트를 이끈데 이어 2009년, 태생부터 지켜보던 키움증권의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금융투자업은 생각지도 못한 분야였다. 더군다나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증권업계가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직업을 바꿀 때마다 늘 위기가 뒤따랐어요. 다우기술에 갔을 때는 벤처 거품이 꺼졌고, 증권사 대표로 취임한 후에는 두 번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죠. 하지만 맡은 일에 대해서는 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신입사원처럼 일했습니다.”

권 대표가 키움증권을 이끌기 시작한 이후 5년 동안 성장을 거듭했다. 온라인 증권사로 시작해 브로커리지(중개수수료) 시장을 공략한 키움증권은 국내 주식거래대금이 6년 반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증시가 침체된 와중에도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키움증권은 올해 브로커리지 시장 점유율 1위를 8년째 지켜냈다.

특히 권 대표가 진두지휘한 기업공개(IPO) 전담팀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차세대 먹거리로 IPO를 점찍고 인력과 투자규모를 크게 늘리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키움증권은 올 들어 총 4개 기업의 IPO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건수 기준으로는 업계 2위다. 2011년과 2012년 각각 1건과 2건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여기에는 IT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권 대표의 발품이 한몫했다. 권 대표는 IPO를 성사시키기 위해 긴 시간 해당 기업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출 3년 만에 업계 상위권으로 발돋움한 IPO 분야에서 앞으로 더욱 좋은 성과를 올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장기전으로 임했습니다. 당장 IPO가 가능한 기업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3~5년 후 IPO를 할 수 있는 알짜 벤처기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신뢰를 쌓아온 것이 이제 숫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또 꾸준히 컨설팅해주는 등 사후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IPO는 내년과 내후년 실적이 더 좋을 겁니다.”

권 대표는 후발주자로 시작한 키움증권에 ‘차별화의 DNA’가 있다고 힘줘 말했다. 일례로 사명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었다. 2000년대 초반 모든 기업이 영어 이름으로 고칠 때 키움증권은 거꾸로 한글 이름을 고집했다. 다들 촌스럽다고 한마디씩 하던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탁월한 선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증권업은 시황에 민감한 업종이지만 매년 좋아지는 사업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키움의 궁극적인 목표다. 그래서 새롭게 부쩍 신경을 쓰고 있는 분야가 바로 자산관리다. 온라인을 통한 자산관리는 다소 생소한 측면이 있지만 최근 온라인 펀드슈퍼마켓이 탄생하는 등 주변 여건은 좋은 편이다. 20년을 바라보고 밀어붙여 볼 생각이라고 했다.

▶“증권업 세계지도를 펼칠 때…발은 땅에, 꿈은 하늘을 찔러야”=얼마 전 권 대표는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금융투자업에 도전해 볼 것을 자신있게 권했다. 증권업이 유례없는 위기에 빠진 지금이 도전해 볼 기회라는 것이다.

“증권업이 굉장히 어려운데 아무도 발 뻗고 잘 수 없는 바로 지금 본게임이 시작됐습니다. 어려우니 되돌아볼 수 있는 겁니다. 거품이 있었는지, 타성에 젖어 일했는지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시기입니다. 거품이 걷히고 실체가 드러나면 그 틈에서 기회를 찾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발을 땅에 딛지 않으면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금융산업 전반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대기업의 건너편에 있는 중기벤처와 수출의 반대 격인 내수는 살리자는 공감대가 충분하지만 제조업의 대척점인 서비스업은 아직도 육성에 대한 공감대가 약하다고 지적했다. 서비스업 중 고부가가치는 바로 금융에서 찾을 수 있으며, 따라서 (소비자)보호와 금융규제도 중요하지만 육성이 같이 이뤄져야 금융한류를 꽃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리더는 먼지를 먼저 뒤집어쓰는 사람”=키움증권 내부문화에는 소통을 중요시하는 권 대표의 경영철학이 곳곳에 배어 있다. 직원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두려워말라. 방법론은 소통”이라고 늘 강조한다. 사장 취임 이후 ‘위기경영’ ‘비상경영’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매일 오전 8시 본부장과 허심탄회하게 회사 상황을 공유하는 티타임을 가져왔다. 조직 내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기 위함이었고, 실제 효과는 컸다.

“최고경영자가 부하직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경영진과 실무진을 자주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내부가 소통이 안되면 문제가 터져도 대응할 수 없게 됩니다. 구성원이 수직 혹은 수평으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야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조직이 되기 때문이죠. 중요한 사업을 추진할 때도 부하직원의 아이디어가 성과를 이뤄내면 이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반드시 인정해줍니다.”

권 대표가 생각하는 리더는 무엇일까. 그는 “리더의 어원에는 먼지를 먼저 뒤집어쓰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면서 “리더는 어려운 싸움에서 선봉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 번 같이 일한 사람과는 잘났거나 못났거나 끝까지 보듬어 안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의 운명, 가족=힘이 섰던 그의 목소리는 가족 얘기가 나오자 한결 부드러워졌다. 독립운동가인 이동녕 선생의 직계손인 부인 이용신(52) 씨와는 서울대 전자과 커플이었다. 당시 과에서 가장 미인이었다고 말하는 권 대표에게 여학생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를 묻자 2명이라며 껄껄 웃었다.

부인과의 첫 만남은 훨씬 오래전 마치 운명처럼 이뤄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촌 생일에 놀러갔던 권 대표가 사촌 친구들과 우연히 찍은 사진 속에 지금의 부인이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몇 번 만난 뒤 나란히 서울대 전자과에 진학해 사랑을 키우다 대학원을 마친 후 결혼에 골인했다.

부인은 권 대표에게 늘 든든한 지원군이다. 몇 차례 직장을 옮길 때도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은 채 힘을 실어줬다.

IBM에 근무하던 부인이 2001년 미국 실리콘밸리 IBM연구소로 가면서 10년 동안 기러기아빠의 삶을 살기도 했다. 부인이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교육을 도맡았다. 딸 리나(24) 씨는 방송 쪽에서 프리랜서로 뛰고 있고, 아들 승현(19) 씨는 대학에 재학 중이다.

늘 변신을 거듭한 권 대표에게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물어봤다. 아직은 맡은 일에 전념하느라 생각할 여력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능성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열려 있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과 함께. 도전이 여전히 진행 중인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kimhg@heraldcorp.com

정리=권도경 기자/kong@heraldcorp.com

권용원은 누구… ▶1961년 서울 출생, 동북중ㆍ광성고 졸업 ▶1984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과 졸업 ▶1996년 MIT TPP(Technology and Policy Program) 석사 ▶1986년 산업자원부(기술고시 21회) ▶1998년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근무 ▶2000년 다우기술 부사장 ▶2004년 인큐브테크 대표이사 ▶2005년 다우엑실리콘 대표이사(겸직) ▶2007년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 ▶2009년 키움증권 대표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