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국회가 먹통이다. 한나라당 황우여,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가 지난달 만나 법정기한(12월 2일) 내 처리키로 한 다짐은 올해도 구두선(口頭禪)이 됐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처리와 디도스 사태, 한나라당의 쇄신 갈등, 민주당의 통합 내홍이 겹친 탓에 법정기한은 물론 정기국회 회기(12월 9일) 내 처리도 물 건너갔다. 내년도 업무 보고와 민생예산 집행을 서둘러야 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웬일인지 국회는 차분하다 못해 느긋하다. 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몸을 던지고 목청을 돋우며 ‘선명성 쇼’를 경쟁하곤 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석에서 귀를 세워 봤다. 모두가 제 이름 밝히긴 꺼렸다. 여당 A 의원은 “자기들이 ‘설마’ 예산안까지 나 몰라라 하겠냐. 곧 (예산안 심사에) 들어올 거야”라고 했다. 야당 B 의원은 “총선이 코앞인데 ‘설마’ 저들이 또 날치기하겠어. (FTA 강행처리를) 사과하면 생각해봐야지”라는 입장이다. 참으로 속 편한 이심전심이자 유유상종이다. 최근까지도 민생예산 증액에 목소리를 높였던 여당, 과도한 세출을 줄여 복지를 강화하겠다던 야당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민생과 복지 행보에 속도를 내기 위해 상임위 심사를 거치면서 정부 예산안을 11조5000억원이나 부풀려 놓기까지 했다. 이렇게 하세월하다가는 제대로 된 심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 쟁점에서 비켜난, 그러나 민생에는 긴요한 예산 항목들이 졸속 처리될 판이다. 부실심사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여야가 그리도 오매불망하던 ‘서민’이다. 여야가 처한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2040세대’의 성난 민심과 ‘안철수 바람’에 뿌리 뽑힌 기성정치권은 신당이니, 분당이니, 합당이니 하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선 마당이다. 제 손톱에 박힌 가시보다 다급한 현안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탈출구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 말 못할 고민도 있을 것이다. 여야가 안철수 쇼크를 계기로 기성정치의 판을 새로 짜는 일은 새 정치에 대한 민의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일견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나라살림을 결정하는 예산 심의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이번에도 세밑 부실처리가 되풀이된다면 18대 국회 4년 내내 강행처리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물론, 이미 극에 달한 국민의 불신을 더욱 부채질해 여야 모두 공멸의 길로 치닫게 될 것이다. 제 할 일을 내팽개치고 제 살길만 좇는 구태에, 국회 담장 밖 어느 누구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당명을 바꾸건, 지도부가 교체되건 그건 각당이 알아서 할 일이다. 국민들은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예산이 어디에, 어떻게 편성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지금 국회의 모습은 선후와 본말이 뒤바뀌어 있다. 이는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를 ‘정치 계급, 그들만의 살롱’(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으로 스스로 옭아매는 작태에 다름 아니다. 국민들이 왜 ‘정권 교체’가 아닌 ‘정치 교체’를 원하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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