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명예회장 살아온 길
한국전쟁땐 국토수호 앞장
산업화땐 경제 일군 역군으로
정치 격동기땐 정계진출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한국 철강산업의 기반을 닦은 ‘철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그처럼 다양한 삶을, 그렇게 다이내믹하게 살다 간 이도 별로 없을 정도로 그의 이력은 다양하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스타(장군)’였고, 중년 이후에는 대표 야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당)의 당대표 및 국무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이었다.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고 박 회장에게 바친 헌사처럼,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군인으로서,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으로서,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정치인이 되었던 것이다.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 회장은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자랐다.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8년 육군소위로 임관한 박 회장은 한국전쟁에 출전해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할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5ㆍ16 군사 쿠데타 당시에는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참여했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에 박 회장은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박 회장은 1964년 대한중석(현재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된 후 이 회사를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1968년 4월에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만에 연 550만t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포스코가 짧은 시간 내에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박 회장의 리더십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은 포스코의 성공비결로 각각 ‘모험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력,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의 공헌’과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 등을 꼽았다.
정치 격동기 1980년대에 박 회장은 정계에 진출한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 취임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 1981년에는 제11대 국회의원이 된다. 또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고,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됐다.
물론 박 회장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포스코 회장직 사퇴는 물론, 당직까지 사퇴하는 수난을 겪었다. 또 김영삼 집권 이후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기도 했다.
<신소연 기자@shins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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