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끝까지, 죽을 때까지 (40)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나오는 고사를 찾아보면 ‘여도지죄(余挑之罪)’라는 꽤나 어려운 말이 나온다. 쉽게 풀어보자면 먹다 남은 복숭아를 바친 죄라는 뜻인데, 높은 분의 사랑과 증오의 변화가 극심할 경우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유래까지 살펴보도록 할까?

옛날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살고 있었다나, 뭐라나. 그 소년은 미녀가 남장한 것만큼이나 예뻐서 왕의 총애를 무지하게 받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가 왕을 모시고 과수원에서 놀다가 그만 실수하여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다른 복숭아와 함께 섞어 왕에게 올리고야 말았다는데…

“오호! 자기가 먹던 것까지 잊어버리고 과인에게 바쳤으니 과인을 극진히 생각하는 그 정성이 얼마나 갸륵한가.”

남들 같으면 극형에 처할 일이었으나 왕은 오히려 즐거울 뿐이었다. 그러나 높은 양반의 마음이 어디 한결같기만 할까?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아름답던 모습이 시들어지자 자연스럽게 왕의 총애도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였다. 이를테면 예쁠 땐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모습이 급기야 증오로 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바로 저 놈이 자기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과인에게 먹이려 했던 놈 아니냐? 천하에 몹쓸 놈이로다!”

장황하게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들먹인 까닭은, 몬테카를로 랠리 결승을 하루 앞둔 도종호 상무의 심정이 미자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도종호 상무는 그동안 재벌 2세와 친하게 지냈던 죄 때문에 장차 엄한 징벌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 기자님, 이 사진 좀 신문 1면에 실어주시게.”

“이게 무슨 사진입니까? 자동차 경주?”

“몬테카를로 랠리라고… 대단한 자동차 경주예요. 우리 거성에서 ‘그레이스’란 이름을 달고 출전했는데 이번에 좀 크게 띄워 주세요.”

“그렇잖아도 좀 전에 거성의 홍보담당 사장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선 랠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던데요? 오히려 디트로이트 모터 쇼에 관한 내용을 브리핑 해주시더군요. 이번 디트로이트 모터 쇼에 출품한 거성의 전기자동차에 대해서 대서특필을 부탁받았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내친 김에 랠리 기사도 더불어 대서특필 해주세요. 이게 사실은 깜짝 쇼를 하려고 했던 것이라 기자님들께도 비밀에 붙였던 사안인데…”

“글쎄요, 데스크와 상의 좀 해봐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일이 이 지경으로 돌아가니 도종호로서는 애가 탈 뿐이었다. 모든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기자들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거성의 그레이스 팀이 현재 몇 등으로 달리고 있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등수와 상관있나요? 랠리라는 것이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지요.”

“상무님도 참, 신문의 속성을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일단 랭킹에 들어야 기사의 가치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종일토록 애를 써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몬테카를로 랠리도 막을 내릴 터이니 기사를 올리려면 오늘 저녁이 데드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어쩌랴. 도종호는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 한 잔을 시켜 마시고 재벌 2세에게 고백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뭐라고요? 불가능? 거성그룹의 임원으로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불가능이라고요? 그럴 거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요.”

이걸 어쩌나… 재벌 2세의 목소리에는 서릿발이 서걱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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