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경험·지식 동료와 나누는 게 취미
29년간 국토부서 ‘삽’·‘바퀴’ 두루 경험
감정평가 업무 민간 이양 매듭 당사자
‘서로 조금씩 양보’ 설득...협력 이끌어내
직접 차 타고 노면상태 하나하나 점검
서울~문산고속도로 개통 평생 못잊어
주택값 표본 확대·산정 기초자료 공개
빅데이터 플랫폼도 시장 투명화 ‘한몫’
대뜸 취미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삶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담은 ‘책 만들기’라고 했다. 그런데 출판을 하지 않아 시중에선 살 수는 없다. 제목과 내용이 뭘까 궁금했다. ‘도시에 심고 싶은 나무 이야기’, ‘자동차운수사업법 해설’, ‘대항해시대 그 후’, ‘넓은 하늘 아래에서 본 풍경(미국연수 생활기)’이라는 의외로 깨알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이 책들을 동료와 후배들에게 무료로 나눠 줬다. 자리를 떠나면 그냥 사라져버릴 경험과 지식을 같은 길을 걷는 주변 사람에게 아낌없이 공유한 것이다. 일종의 ‘재능 기부’다. 돈을 받고 파는 책도 아닌 만큼 주고 나면 내 손에 남는 건 없다. 그래도 그는 “나누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다.
내 경험과 지식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뿌듯함에 미소 짓는 사람, 바로 손태락(59) 한국부동산원 원장이다. 손 원장은 지난 2월 26일부터 ‘한국부동산원에서의 경험’이라는 책을 써 내려가고 있다. 3년간의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책의 두께도 만만찮을 것 같다는 손 원장, 최근 그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부동산원 서울사무소에서 만났다. 30여년 공무원으로서의 삶과 이곳에 오게 된 ‘우연 같은’ 필연의 스토리, 그리고 한국부동산원의 현재와 미래까지 들어봤다.
손 원장은 29년간 국토교통부에 몸담았던 관료 출신이다. 그가 국토부에서 해결하기 가장 까다로웠던 과제로 꼽은 것은 공교롭게도 지금의 한국부동산원과 관련이 있다.
그는 2015년 국토부 주택토지실장(1급) 재직 시절 ‘한국감정원법’(현 한국부동산원법)을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다. 한국부동산원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지 존립 근거를 규정하는 내용이다. 법안을 만드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공공(한국감정원)’과 ‘민간(감정평가사협회)’에 중복된 감정평가 업무를 교통정리하는 건 무척 까다로운 일이었다. 10여년간 한국감정원과 감정평가사협회가 벌여온 ‘감정평가 신경전’이기도 했다. 시작부터 양측의 의견이 팽팽했고 중간에서 이를 조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수많은 논의 끝에 결국 감정평가 업무를 민간에 넘기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손 원장은 “공공과 민간이 세부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을지 정리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면서 “이번에는 꼭 결론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협상을 벌이고 협력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이를 마무리한 2015년 12월은 그가 주택토지실장으로 보낸 마지막 달이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10여년 묵은 숙제를 해결하면서 한국감정원은 가격 공시와 통계, 조사 등 공적 사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후에는 간판도 ‘감정원’에서 ‘부동산원’으로 바꿔 달고 현재의 한국부동산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갈등이 생겨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협의를 끌고 나갔다. 양측의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듣다 보니 어느새 길이 보였다”면서 “이런 협상은 서로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상대방이 양보하는 부분이 금방 보이게 되고, 내가 양보한 것도 큰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보다 수월하게 합의에 이르게 된다”고 나름의 노하우(?)를 털어놨다.
손 원장은 “이 부동산원법을 만들 당시만 해도 한국부동산원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인연은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웃음 지었다.
손 원장은 어릴 때부터 남을 돕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선친이 고향인 경북 포항(당시 영일군) 지역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역사책을 즐겨 읽었던 그는 과거 공신의 충심 어린 간언(諫言)이 중요한 역사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대구로 온 그는 경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제31회)에 합격하고 1987년 공직에 입문했다.
처음엔 철도청 공무원으로 발령받았고, 2년 뒤 교통부에서 철도와 자동차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994년 건설부와 교통부가 통합되고 나서는 기획관리실 예산 업무부터 건설경제, 주택토지, 국토도시 업무 등을 맡았다. 국토부 내에서 흔히 말하는 ‘삽(국토)’과 ‘바퀴(교통)’를 두루 거쳤다. 손 원장은 주어진 과제는 반드시 완수한다는 철칙을 지켰다.
그는 “한국감정원법 제정을 비롯해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의 전신이 된 기업형 민간임대주택(뉴스테이) 정책도 도입했다. 과거 사업을 시작한 행복주택이 이번 정부 들어 준공되면서 성과를 보인 것도 있다”면서 “목표를 세우고 추진한 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뤄냈다”고 말했다.
손 원장은 서울문산고속도로㈜ 사장을 맡아 도로 개통을 위해 불철주야 뛰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서울문산고속도로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에서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까지 35.2㎞를 연결하는 왕복 4~6차로다. 이 사업은 토지보상비 등 일부 비용을 국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민간이 부담하는 민자사업 방식으로 추진됐다.
손 원장이 2018년 4월 사장으로 부임했을 땐 설계 변경, 민원, 보상 문제 등으로 사업 진척이 더딘 상황이었다. 실시협약상 사업시행자인 서울문산고속도로는 실시계획 승인 후 3개월 이내에 공사를 시작하고, 착공 후 5년 내 완공해야 했다. 지난 2015년 11월 착공된 만큼 데드라인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마음이 다급해진 손 원장은 본격적인 협의에 속도를 냈다.
그는 “민간 쪽에서는 건설업체와 금융기관과의 조율이 중요했고, 철탑을 옮기는 문제는 한국전력공사, 서울지방국토관리청과 협의해야 했다”면서 “여러 기관과 협의하며 행정 절차를 단축하고자 애를 썼는데 국토부에서 쌓은 경험이 없었다면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손 원장은 도로 개통 직전에 차를 타고 다니며 노면 상태를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차량이 덜컹거리는 구간이 발견되면 곧바로 평탄화 작업을 통해 도로 품질이 완벽하도록 공을 들였다.
도로가 개통된 지난해 11월 7일은 손 원장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당시 개통식은 6일 낮에 했지만, 차량 통행은 7일 자정부터 시작됐다. 경찰이 이날 ‘0시 정각’에 바리케이드를 해제하니 통행을 기다렸던 차량들이 새 도로를 신나게 달려나갔다. 이 광경을 상황실 폐쇄회로(CC)TV로 지켜봤다는 손 원장은 “차에서 나오는 불빛이 도로를 밝히던 가슴 뭉클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한국부동산원 서울사무소 회의실 벽에는 ‘신뢰받는 기관, 혁신하는 조직, 직원이 행복한 일터’라는 경영 방침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손 원장은 “세 가지 표현 가운데 ‘신뢰받는 기관’을 첫 번째로 쓴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면서 “업무 영역이 확대된 만큼 각 분야에서 신뢰를 얻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손 원장은 국민적 관심이 높은 주택가격 통계, 부동산 공시가격 등의 신뢰도 제고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는 “주택가격 표본을 대폭 늘리고 지수 안정성을 검증하기 위해 기존 표본과 신규 표본의 통계치를 비교해가며 정리를 하고 있다”면서 “이르면 6월께부터 확대된 신규 표본으로 조사·공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부동산원은 주간·월간 통계의 표본 수를 각각 9400호에서 3만2000호로, 2만8360호에서 4만6170호로 확대하기로 했다. 주택·통계학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주택통계 지수검증위원회’를 통해 검증 작업도 강화한다.
손 원장은 공시가격에 대해서도 “이달 29일 공동주택 공시가격 결정·공시를 할 때 산정 기초자료를 공개할 예정”이라면서 “추후 이의신청 과정에서도 이의신청인에게 결과와 세부 검토 내용을 함께 통보해 산정 과정의 논란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손 원장은 한국부동산원이 보유한 정보를 시장에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부동산 빅데이터 플랫폼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면서 “한국부동산원이 취합·가공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부동산 산업 발전과 시장 투명화에 이바지하겠다”고 말했다.
경영 방침에 담긴 혁신하는 조직, 직원이 행복한 일터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다. 그는 그럴 때마다 사내식당으로 향한다. 직원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선 다양한 얘기가 오가고, 자연스럽게 조직 운영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다. 식사 후 직원들과 대구 본사 인근의 공원을 산책하며 담소도 나눈다. 손 원장은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는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문화가 먼저 조성돼야 한다”면서 “최근 각 지사를 돌다 보니 각 분야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대해 시상하고 내용을 공유해 확산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임무가 주어지든 이를 묵묵히 수행하며, 늘 새로운 길을 열어 왔던 손 원장. 그가 한국부동산원에서 만들어 낼 새로운 길이 어떨지 3년 뒤가 자못 궁금해졌다.
대담=권남근 건설부동산부장
정리=양영경 기자
사진=이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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